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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24. 2020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나에게는 인생의 책들이 몇 권 있다. 삶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보듯 열어보곤 하는 책이다.

그 책 중 두 권이 크리슈나무르티의 <삶의 진실을 찾아서>(홍신문화사, 2014)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외 1인의 <인생수업>(이레, 2015)이다. 이 두 권은 기본편에 해당한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삶의 문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근본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반면 응용편에 해당하는 인생의 책들도 있다. 그 중 한 권이 바로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다.


만약 내 인생을 역사책처럼 시대로 구분한다면 책의 장르로 나눌 수 있다. 동화책, 청소년 소설을 읽던 초중고 시절, 전공 서적만 읽던 20대, 자기계발서를 통해 나를 채찍질하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심리, 정신분석류의 책을 통해 나와의 관계를 비롯한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던 30대 후반.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계속 이어진 공통 주제는 ‘나란 무엇인가’와 ‘존재의 의미’, ‘나를 사랑하는 법’, ‘글쓰기’와 ‘독서’에 관한 책이다.


나의 8할은 책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 삶은 그동안 읽어 온 책들로 채워져 있다. 그 시기에 읽은 책과 그 책의 서평에는 그 당시의 소중한 사람들이 들어 있다. 내게 서평은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 추억을 담은 보물상자이자, 언제나 현재의 시간을 담고 있는 비밀스런 일기장이다.


무엇을 위한 여행인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주인공이 현재의 삶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변화를 위한 여행, 일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해석만으로는 도저히 서평을 쓸 수 없었다. 책 속의 매력적인 구절들에 마음을 주며 조각조각의 서평은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한 권에 대한 내 생각은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게다. 과연 그는 그 여행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을까. 그는 여행 가기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했을까. 그는 30년 이상 공부해 온 고전을 버렸을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 답을 내릴 수 없는 내가 있었다.


물론 겉모습은 변했다. 낡고 시력이 맞지 않았던 안경을 바꾸었기에 전보다 세상은 더 뚜렷하게 보였다. 낡아서 구멍이라도 있을 것 같았던 스웨터는 새 옷으로 바뀌었으니 이미지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프라두라는 사람의 삶과, 그의 책을 만남으로써 그를 만나기 이전의 사람으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무작정 몸을 싣던 사람과 그런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던 사람으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레고리우스라는 사람의 가장 중심에 있는 본질 그 자체가 이 여행을 통해 변했을까.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책인 <삶의 진실을 찾아서>(홍신문화사, 2014)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지혜의 시작이고, 따라서 변혁과 쇄신의 시작이기도 하다.(p22)”


자신을 알아야만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변화라는 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이동이다. 하지만 이곳과 저곳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면 저곳으로의 이동은 단순한 위치의 변동일 뿐 참된 의미의 변화가 아니다. 사람들은 가끔 어떤 곳의 문제를 피하고자 다른 곳으로 도망친다. 지금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막연하게 저곳에서는 그 문제가 없을 것이라 기대하며 회피한다. 하지만 장소만 바뀌었을 뿐 문제의 중심에 있는 나 자신은 바뀌지 않았다. 자신의 삶의 문제는 결국 관계의 문제다. 나와 상대가 만들어낸 관계의 문제에서 그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지 않은 채 도망친다면, 또 다른 상대와 그 문제를 다시 반복하게 될 뿐이다. 


간혹 가족이 싫어서, 집을 나오고 싶어서, 그래서 결혼했다며 자신의 이혼 또는 부부의 불화를 부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렇게 숨 쉴 수 없고 도망치고 싶게 만든 부모의 책임도 있을 게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 당시 그 사람의 선택은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일어서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기대고 의지하고 싶었던 것, 그것이 그 사람의 선택의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의 내 위치와 현재의 내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모든 신념과 이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념과 이상이란 단지 참된 파악을 왜곡시키고 색깔만을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p23)”


여기서 말하는 신념이란,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과거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 내린 나에 대한 정의이며, 이상이란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가 그린 그림 속의 자아이다. 이 신념과 이상은 현재의 나를 보지 못하게 가로 막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때로는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관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환경은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익숙한 관계들은 그들 또한 상대를 자신만의 안경으로 바라본다.


또한 나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에 대해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런 말들도 한다.


“자신에 대한 이해는 순간순간 이루어진다.(p26)”


“자신에 대한 이해는 결과나 정점(頂点)이 아니다. 그것은 소유물과, 사물과, 사람들과, 관념들에 대한 한 인간의 관계 –관계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순간순간 보는 것이다.(p28)”


자기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신념과 이상에서 벗어나, 현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곧 살아있는 삶을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도 않고 미래의 되고자 하는 이상에 얽매여 오늘을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을 오늘로 살 때 우리는 자신을 알 수 있다. 자신을 알 때 우리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사실 아직 난 오늘을 오늘로 산다는 것, 내 살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카르페디엠(carpe diem)을 인생 문구로 사용하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이 말이 곧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나는 오늘을 살 수 있는가. 여전히 이 질문에 답은 모른 채 오늘을 살고 싶다는 소망은 버리지도 못한다. 그러한 내가 지금 찾은 답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삶, 그것이 오늘을 오늘로 사는 것’이며 그것이 곧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것이며 과거 때문에 오늘을 망치지도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을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소중하기에 지키고 싶고 아껴주고 싶을 테니 말이다.


야간열차에 몸을 싣던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 삶에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을 때도, 영화로 보았을 때도 그에게 있어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해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소중하기에 지키고 아끼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는 그저 주어진 숙제를 해내듯 ‘성실하게’ 삶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불현듯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났다베른을 찍자평생 살아온 곳을 붙들어 놓자단순한 인생 무대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건물과 골목과 광장들을...”(p565)


위의 문장은 이 책의 마지막 쯤에 있던 표현이다. 서평을 쓸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저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은 눈에 익을 대로 익어서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고 믿었을 자신의 삶의 터전을 사진으로 찍는 것이었다. 익숙한 자신의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고 해석해 버릴 수도 있지만 내 안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그는 57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이제 완전히 장악하려고 한다는불안과 해방감이 섞인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p22)


서평을 쓸 수 있게 된 지금 내가 내린 결론은, 그는 드디어 이제 오늘을 오늘로 살게 되었고 드디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삶에서 소중히 여긴 것이 무엇인지는 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제는 봄을 글이 아닌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똑같이 정해진 시간에 학교를 가고 정해진 수업을 하고 정해진 과제를 체크할지라도 그는 분명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감사를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소중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삶의 주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무엇이 그를 떠나게 하였는가


언어로 이루어진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레고리우스와 프라두.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언어였다. 프라두와 그레고리우스를 만나게 한 것도 언어이며 그들 자신이 자신을 알아가게 한 것도 언어이다.


“‘그레고리우스그건 글이 아니에요사람들이 말하는 건 글이 아니라고요그냥 말을 하는 거예요.’ (중략그레고리우스가 사람들이 서로 연관이 없고 모순된 말을 한다고그리고 말한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고 불평했을 때 한 대답이었다독시아데스는 (중략사람들이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언어학자특히 움직일 수 없이 확실한 단어 -수천 가지 주석이 달린를 하루종일 다루는 고전문헌학자들에게나 드는 생각이라고 했다.”(p180~181)


사람들은 그저 말을 내뱉는다. 그냥 말하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그 말은 마음이 만나지 않는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만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이런 사실들이 그레고리우스는 견디기 힘들었고 프라두 또한 그래 보였다. 프라두에게 말이란 존재 자체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p529)


프라두의 위의 말에 대해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실우베이라는 말한다.


그러니까 언어가 사람들의 빛이로군사물은 말로 표현되고서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 거군.”(p529)


그레고리우스나 프라두처럼, 언어, 말이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말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글자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말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아니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이라는 책 속 단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에게 母語모어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다.(p142)”


김애란 그녀의 소설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이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이다.(p127)”이다. 마지막 화자이기에 우리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이 외로움 속에 몸부림치며 고뇌하며 쓰고 읽고를 반복하던 프라두와, 그의 글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 결국 그레고리우스가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하게 만든 것은 결국 언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을 살다


그레고리우스가 몸을 실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 그 여행은 그가 현재를 버리고 떠나던 무모한 일탈이 아니며 도망도 아니다. 따라서 그는 그 여행을 통해 오늘 이 순간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만나고 오늘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지라도 그는 더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는 30년 이상 살았던 학교와 길과 집에서도 매일 새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까. 서두에서 던진 이 의문들은 이제 의미가 없어진다. 그는 여행을 통해 변화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안의 중심은 변화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변했다고 한다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을 것이다. 관점이 바뀌었기에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삶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심에 있는 본질 자체는 여전히 그대로가 아닐까.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그러나 지금은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p27~28)


이 글을 마지막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떠나보내려 한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어디까지나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낀 결론이다. 나는 살아있고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며 새로운 나를 만나기에 내일의 나는 다른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언어로 경험을 표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단 생각은 언제나 한다. 언어는 현실을 가둔다. 미화한다. 단정짓는다. 그럼에도 언어로 만들어진 나는 결국 언어의 한계를 알면서도 언어로 남긴다. 언어 안에서 좌절하고 언어로 기뻐하고 언어로 고민하고 언어로 생각하고 만다. 그게 바로 나란 사람이며 나란 사람이 오늘을 사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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