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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03. 2020

허정도의 <책 읽어주는 남편>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숫자만큼 많은 생각들이 있다.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실제로 느끼게 될 때면 매번 신기하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게 된다.

든든한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하루하루의 직장의 무게와 피로로 인해, 늘 저 너머의 부를 기대하며 주식과 투자, 돈 버는 이야기가 주된 대화인 사람들. 그리고 직장 내의 인간관계에 대한 불만, 고충이 주된 대화인 사람들. 분명 필요한 이야기인 건 사실이지만 오로지 그러한 이야기들만 반복될 때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여기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책을 읽고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계절의 변화를 마음으로 보려 하고 하늘을 보려는 사람들이 한심해 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로 수용할 수 없는 저 너머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상대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닐 때, 그들은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들지도 모른다.


잦은 어긋남을 느끼는 동료 둘이 있다. 한 쪽 편이 유난히 대화에서 어긋남을 토로한다. 성격 차이라고 말하거나 너무 오래 함께 일하기에 그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 동료는 말했다. 서로의 대화의 목적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고. 자신은 말을 거는 이유가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목의 의미로 말을 거는 것인데 상대는 이유가 필요한 것이기에 의미 없는 질문을 귀찮아하는 게 아닐까 라고 말했다.

서로의 언어와 문법이 다른 사람. 그런 사람들 간의 대화는, 역시나 쉽지 않을 게다.


“‘책 읽어주는 남편이라고 하면남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기대를 가질지 모르지만 사실 책 읽어주기는 우연히 시작된 일입니다. (중략단순히 아내 눈 주위에 발병한 안부대상포진 때문이었습니다.(p16)”


이 책에 손을 뻗은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 속에 쏘옥 넣고 싶은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서로의 언어와 문법이 너무 다르다면 노력으로도 그 간격을 메울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모양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노력으로 간격을 좁힐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를 하고 있다. 익숙함으로 인해 서로에게 권태가 찾아올지라도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관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다.


함께 책을 읽고 책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를 그림으로 그리곤 했다. 먹고 사는 이야기나, 돈 버는 이야기 등 당장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의 공유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꺼내어볼 수 있는 다른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 때 그들의 관계가 오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눈 주위의 병으로 인해 눈을 감은 채 꼼짝 없이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을 때, 저자는 아내를 위해 책을 읽어주기로 결심한다. 아내를 위해 남편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와 의무혹은 서비스 차원의 이벤트 (p17)”라는 표현을 저자는 하지만, 이는 아내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아닐까 싶다.


책을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읽어줘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알겠지만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솔직히 어렵다. 직업상 아침 8시쯤부터 오후 6시까지 통역을 한 날은 2~3일만에도 완전히 방전이 되어 버린다. 내 목소리가 아닌, 타인의 목소리를 내 입으로 말하는 스트레스는, 내 생각을 내 입으로 떠들 때와는 또 다른 에너지 소모가 있다.


저자도 책 읽어주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내의 몸의 통증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아내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책 읽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내의 병이 나은 지금까지도 책 읽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 장까지 넘기고 나서 아내에게 내 생각을 말했습니다앞으로도 책을 읽어주겠다고아니 둘이서 함께 책을 읽자고 말입니다.(p25)”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관계.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면 더 없이 기쁘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책의 첫 장을 열었다. 역시나 책을 매개로 저자는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고 더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듣는 이도 읽는 이도 서로를 배려하기에 함께 책읽기는 유지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아내와 차분하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아내와 아내의 어머니 사이에 감추어 두었던 서러움과 아픔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어머니를 향한 애잔한 그리움을 알게 되었습니다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풀어졌고 그 속에 아내의 회한이 녹아 나왔습니다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책의 위대함이 거기 있었습니다.(p105)”


사실 공유의 대상은 꼭 책이 아니어도 된다. 하지만 책이기에 가능한 것 또한 있을 게다. 부부, 가족이기에 누구보다 서로를 더 오래 알아왔고 가면을 벗은 모습조차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말할 수 없는 것들 또한 있다. 차라리 남이라면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지만 평생을 함께 해야 할 사람이기에 더 쉽게 꺼내지 못하는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럴 때, 조금 더 자연스럽게 나를 보여줄 수 있게 돕는 것이 저자 부부에게 있어 책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책 속의 주인공의 삶의 희로애락을 보며 각자의 혹은 함께한 시간들의 희로애락을 곱씹어 보고, 나누어 본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뿐 아니라 책을 통해 앞으로의 희망, 바람에 대해 ‘같은’ 그림을 그려 보기도 한다.


아내와 함께 책을 읽으면서 기쁜 일이 참 많아졌습니다기대하지 않았고 예측하지 못한 재미들이 생겼습니다함께 여행하고 싶은 장소들을 이야기하며 목표로 삼은 것도 그런 행복 가운데 하나입니다언젠가는 책을 통해 보고 느낀 도시와 자연을 직접 찾아갈 것이라는 즐거운 기대감이 부부 사이에 끊이지 않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줍니다.(p134)”


저자는 또한, 이렇게 부부끼리 읽은 책을 자녀들에게 남겨주고 싶다는 말도 한다.


읽은 책의 첫 장에는 읽기 마친 날짜를 적어둡니다날짜가 적힌 책들은 모두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생각입니다. (중략훗날 아이의 필체로 ‘2030년 0월 0이라고 쓰인 책이 아이들의 책꽂이에 나란히 꽂힌다면 금보다 나은 유산이 아닐까 싶습니다아이들 생각은 다를지 모르지만 아내와 내가 생각해낸 최고의 유산입니다.(p247)”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최고의 유산이 ‘함께 읽은 책’이라고 말하는 부부. 이는 분명 서로 언어와 문법이 통하는 관계이기에 가능한 것일 거란 생각이 든다.


어제 아는 분과 잠시 통화를 했다. 한참을 통화하고 있는 데 전화 너머로 큰 소리로 “나 왔어”라는 장난스런 말소리가 들렸다. 꽥하며 장난치듯 지르는 소리도 함께 들렸기에, 그 분의 아들인가 싶었다. 다음 날 그 분의 따님을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빠였다고 말했다. 솔직히 깜짝 놀랐다. 밤 11시에 귀가한 남편이 그렇게 큰 목소리로, 통화하는 아내를 향해 장난치듯 말하는 것도 신기했고 그 장난을 웃으며 받아주시는 그 분의 모습도, 참 아름답게 보였다.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중략젊고 가난했던 부부가 단독주택을 가진 중산층 초로의 부부로 변했고우리 둘만이 아니라 다른 둘딸과 아들이 생겼습니다하루만 보지 않아도 못살 것 같던 뜨거움도 식어 이제는 여자와 남자가 아니라 오누이처럼 되었습니다내 정수리의 머리칼은 눈에 보이게 줄었고 아내의 앞머리에는 고운 서리가 내렸습니다.

좋아하는 음식도생활습관도 비슷해졌습니다사고방식이나 세상 보는 눈이 닮아져버렸습니다결혼한 뒤 31년 동안 상대방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갔더니 이윽고 붙어 서게 되었습니다.(p46)”


책을 너무 많이 읽었을 때의 단점이 하나 있다. 점점 더 이상이 커진다는 점이다. 이제 현실에 타협할 나이도 되었건만, 이상으로만 여겨지던 것들이 책 속에서 이렇게 현실로 담겨져 있을 때, 이상을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상대방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가서 서로 붙어 서게 되었다’는 이 문장은, 다시 한 번 나의 이상을 확고하게 만든다. 지식을 얻기 위한 책읽기도 있지만, 이 책처럼 세상이 그렇게 차갑지만은 않다는 사실, 이상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위한 독서도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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