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Nov 06. 2020

인내를 모으다


# 인내가 부족하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나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인내'라는 생각을 해왔다. 숙제가 아닌 자신과의 대화로서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시절부터였다. 나에게 인내가 부족함을 알게 되고 2~30년 이상은 지났건만, 여전히 나에게는 인내가 부족하다. 


인내를 가지라고 수많은 책들이 말한다. 김형경은 자신의 책 <만가지 행동>에서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정신은 낙타가 되어야 하고, 낙타는 사자가 되어야 하고, 사자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 

낙타는 단순성과 인내, 사자는 용기, 아이는 천진을 의미할 것이다."


이 문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결국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성과 인내, 용기, 천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세상을 지나치게 복잡하고 심각하게 바라보면 삶은 살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볍게 내쳐서도 안된다. 인내가 필요한 순간과 용기가 필요한 순간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꾸밈없는 자연 그대로의 천진한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나의 해석이며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이자 마음가짐이다. 


인내가 삶에 필수불가결한 자세임은 안다. 나 스스로도 느낀다. <언품>의 이기주 작가가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인내의 연속"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도 나란 사람과 주어진 이 생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 인내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간절함이 부족했던 탓인지 여전히 나는 갈증이 난다. 애가 탄다. 그래서 이렇게 오늘 인내를 모으기로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방법으로. 


나는 삶의 문제에 부딪히면 책을 펼친다. 책 안에서 답을 찾는다. 책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밖에 나는 모르니까.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헤쳐나가는 내 옆의 그 사람,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나는 달라질 줄 알았다. 그의 색깔이 나에게 물들어 나도 그와 닮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책 속에서 답을 찾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에는 '생각'을 말하는 나와, '경험'을 말하는 그가 있다.


# 인내를 말하다


인내에는 타인에 대한 인내, 자기 삶에 대한 인내, 자기 자신에 대한 인내가 있다. 나는 여기서 자기 삶에 대한 인내와 나 자신에 대한 인내가 가지고 싶다. 인내를 가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과 나에게 인내가 없다는 갈증은 있다. 하지만 인내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도대체 인내가 무엇인지 나는 과연 알고 있는가라는 의문에 도달한다. 인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형체 없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며 졸라대고 있었다. 인내란 무엇인가.


인내란 참고 견디는 것이다. 아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다. 나를 설득할 수 있는 말이 필요하다. 여러 책들에 인내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알랭 드 보통 외의 <영혼의 미술관>에 의하면, "인내는 스릴과 거리가 멀다. 사실 인내는 흥분하지 않고 지내고, 욕구 충족을 미루고, 지루함과 무덤덤함을 견디는 능력이다." 달라이 라마 외의 <좋은 사람>에서는 "인내란 시간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P.M.포르니의 <생각하며 산다는 것>에서는 "인내는 욕구를 실현할 수 없는 현실에 분개하지 않는 것, 즉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수용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한다. 


지루함과 무덤덤함을 견디는 것. 욕구 충족을 미루는 것.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꿈과 욕구, 그 현실에 분개하지 않는 것, 바뀌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인내라고 책들은 말한다.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인내라는 설명보다는 납득이 간다. 이 모든 감정들이 내게 있다. 나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이러한 인내를 '할 수 있게 만드는 한 마디'가 있다. 송승훈 외의 <함께 읽기는 세다>에서 인내가 필요한 이유로 "흔들림과 성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생각한다. 인내는 그저 꾹꾹 감정을 누르고 참고 참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저 견디는 시간이 아니다. 인내란, 흔들리고 있지만 성장을 위해 거쳐야만 하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버려지는 시간도 아니며 불행한 시간도 아니며 내가 잘못해서 마주치게 된 시간도 아니며 포기도 아니다. 


"인내가 주는 한 가지 배움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원하지만 한동안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식일지라도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위의 문장은 나의 인생의 책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의 <인생수업>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내를 가지고 싶다고, 나에게 부족하다고 그렇게 오랫동안 갈급해 오면서도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것은, 나는 그것이 부족함은 알면서도 인내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나도 모르게 거부했던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내가 생각한 인내는 그저 견디고 참는 포기의 느낌이었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갇힌 느낌이고, 그 인내의 순간이 오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겪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인내의 끝에는 그저 견딤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내는 포기가 아니다. 죽은 시간이 아니다. 그저 흔들리기만 하는 고통의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끝에는 삶에 대한 믿음이 있다. 내가 원하는 그림은 아닐지라도 결국에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내 삶은 순리대고 가고 있다는 것, 나는 알지 못하는 더 큰 존재가 나를 더 좋은 곳으로 이끌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인내의 진정한 의미이다.


# 나이테를 만드는 중이다


인내에 대한 생각의 끝자락에서 나이테를 떠올린다. 나는 나무가 참 좋다. 좋은 이유는 모르겠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모르듯, 나는 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이유를 모른 채 마냥 좋아한다. 나무도 그렇다. 내가 왜 나무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나무를 심어본 적도 없다. 매일 나무를 찾아가 보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무라는 것 자체가 마냥 좋다. 나무가 좋아서 나무를 닮고 싶어서 인내에 관한 생각의 끝자락은 나무로 마치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김소연 작가는 자신의 책 <수작사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쉽지 않았던 성장의 흔적을 나이테는 고스란히 보여준다. 극심한 가뭄이나 양분 부족으로 성장 혹은 생존 자체에 위기를 겪었던 흔적은 째지게 촘촘한 나이테에, 마음 놓고 생장점을 넓혀 태평성대의 기억은 널찍하니 시원한 나이테에 담겨 있다. 감탄을 자아내는 가구의 결이란 바로 이 나이테다. 가구의 결은 표면의 무늬만이 아니라 나뭇결은 세월로 이루어진 나무의 몸이다."


아무래도 내가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인내심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나무에게 나는 동경에 가까운 사랑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나무의 나이테에 새겨진 그 견딤의 시간. 한 곳에서 주어진 환경에 불평, 불만 없이, 떠나지도 못한 채 긴 시간을 견디는 그 나무에게서 나는 동경과 존경의 빛을 띠는 사랑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나무를 사랑했던 헤르만 헤세도 자신의 <나무들에서>라는 책에서 나이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이테의 바르고 일그러진 모양새에는 모든 싸움과 고뇌, 행운과 번영의 역사가 그대로 씌어 있다. 빈곤했던 해, 견뎌낸 폭풍우와 시련들.... 가장 단단하고 품격 높은 나무일수록 촘촘한 나이테를 갖고 있다는 사실과, 높은 산 끊임없는 위험 속에서야말로 가장 강인하고 옹골찬 나무가 자란다는 것은 농가의 소년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인생의 진리다."


'가장 단단하고 품격 높은 나무일수록 촘촘한 나이테를 갖고 있다'는 헤세의 이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는다. 인내는 나이테를 만드는 시간이다. 나이테가 새겨지느라 아프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고 그랬던 것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움츠리며 수동적인 자세로 피하지 말고 이 인내의 시간을 삶의 시간으로 당당히 받아들여야 한다. 


멋지고  화려한 꽃을 피우지는 못하지만 우직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나만의 꽃을 피우는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가 되어 나의 스승들이 나에게 그러했듯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베풂으로 채워지는 삶을 살고 싶다. 내 안의 나이테가 어여쁜 문양이 되는 한 그루의 건강한 나무로 살고 싶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허정도의 <책 읽어주는 남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