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Nov 12. 2020

후회를 배우다

나쓰메 소세키의 <피안 지날 때까지>


사람이 고프다     


나는 외롭다는 말을 거부한다. 그래서 책이 고프다고 표현한다. 외롭다고 말하는 친구의 말조차 따뜻하게 받아주지 못한다. 고독과 외로움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이라 여긴다.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지병과 같은 감정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러한 나의 생각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안에는 분명 책이 고픈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고프다는 외로움이 들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감정을 회피했음을 느낀다. 이 거부와 회피의 이유를 파고들어 보니 어릴 적 기억에 도달한다.    

  

앞뒤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몇 안 되는 엄마와의 시간 중 하나로 내 안에 선명하게 남은 장면이 있다. 분명 엄마는 나를 버리고 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낯선 고속버스터미널 한가운데 홀로 남겨졌고 불안함에 미친 듯이 울어댔다. 꿈일지도 모를 그 장면이 사진처럼 남아있다. 내 기억 속 부모는 언제나 떠나는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가 이 글을 읽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게다. 그렇지 않은 기억이 더 많다고 말할 게다. 하지만 몇 안 되는 그런 순간들이 내 안에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지 나의 모든 세포는 떠나가는 사람들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품지 않는다. 사람은 떠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하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도 언제나 끝을 생각했다. 언제나 만남과 함께 이별을 예상한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이별을 해 왔다.      


그것이 내가 나를 분리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방법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아무것도 곁에 두지 않음으로써 무언가가 나를 떠나도 상처받지 않고 싶었던 것일 게다. 내 안의 어린 나를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것일 게다. 마흔의 입구에 선 지금, 처음으로 후회를 배우고 싶단 생각을 한다.      


후회를 받아들이다     


친구의 외롭다는 말과 같은 크기로 내가 거부했던 단어가 후회라는 감정이다. 나는 후회를 거부한다. 나는 후회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거부해 왔다. 많은 책들이 후회 없이 살라 말한다. 후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 나는 그 책들처럼 후회하지 않으며 살고 있고 후회란 나에게 없다고, 나는 잘 살고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내가 그동안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몇 가지 감정을 돌아보며 나에게 그 책들이 말한 참된 의미의 ‘후회 없이 살다’가 아닌, 후회를 회피한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다.

     

나는 사람이 고프다고 말하지 못한다. 사람을 그리워하게 되면 그 사람이 언젠가 나를 떠날 것만 같아서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롭지도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외로워지면 책을 펼쳤다. 그렇게 책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그 친구는 나와 맞지 않아서, 시간이 아까워서 등등의 이유를 대며 사람을 내 삶에 중요한 존재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솔직히 말하고 싶다. 나는 책이 고픈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고픈 사람이다. 용기가 없어서 두려워서 사람이 고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책이 고프다고 말해왔고 외롭지 않다고 말해왔고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제야 나는 후회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내가 거부해 왔던 감정을, 강한 척하며 회피해왔던 감정인 ‘후회를 한다’.      


“멋지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하루를, 그리고 하나의 계절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산다면, 우리는 그날들을 다시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후회를 가져다주는 것은 살지 않은 삶입니다.”     


나의 인생의 책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의 <인생수업>에는 위와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나는 후회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삶을 산 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살지 않았으면서 진정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후회를 모으다     


나쓰메 소세키는 내가 사랑하는 여러 작가 중 하나다. 숨김없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의 용기 있는 순수함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린다. 그는 자신의 책 <피안 지날 때까지>라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저 나는 나 자신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저 나다운 글을 쓰고 싶을 따름이다. 재주가 모자라 나 이하인 것이 완성되거나 뽐내는 마음 때문에 나 이상인 체하는 것이 씌어져서 독자에게 죄송한 결과를 내놓게 될까 우려할 뿐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이 문장이 처음부터 내 안에 있던 것인지 아니면 그의 글을 읽고 나까지 동화된 것인지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없다. 그저 이 문장은 내 일기를 읽는 것과 같다는 느낌만 남아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글은 그 사람 자신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소설임에도 그의 글을 그의 일기를 훔쳐보듯 읽고 만다.     


<피안 지날 때까지>에는 대학 졸업 후 구직 중인 게이타로라는 청년과 그의 친구 스나가, 그 외의 주변 인물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불안에 대해 쓴 책이다. 이 중 스나가 이치조라는 사람에게서 나는 나를 보았다. 스나가에 대해 나쓰메 소세키는 이렇게 말한다.    


“남자로서 나 자신이 질투심이 강한 편인지 어쩐지 잘 모른다. (중략) 나는 아직 애절한 사랑에 빠진 경험이 없다. 여자 하나를 두고 둘이서 다툰 기억은 더욱 없다.”    

 

“고백하건대 나는 오늘까지만 해도 고등교육을 받은 증거로 내 머리가 남보다 복잡하게 작동하는 것을 자만해 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작동에 지쳐 있다. 무슨 업보로 이렇게까지 모든 일을 자잘하게 쪼개어 생각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가 생각하면 한심했다.”     


애절하게 사람을 사랑해 본 적도 없고, 만약 사랑에 있어서 경쟁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사랑을 놔 버린다고 말하는 사람. 무엇이든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 그것이 스나가다. 스나가는 또한 이런 사람이다.      


“내 머리는 가슴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행동의 결과라는 면에서 극심한 후회를 남긴 적 없는 과거를 되돌아볼 때 이것이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상태라고 본다. (중략) 머리와 가슴이 싸울 때마다 늘 머리의 명령대로 굴복해 온 나는 어떤 때에는 내 머리가 강하니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때에는 내 가슴이 약하니까 그러하다고도 생각했다.”     


스나가는 말한다. 내 머리는 가슴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극심한 후회를 한 적이 없다고도 말한다. 머리와 가슴이 싸우면 언제나 머리가 이겼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처음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늘 그랬다. 늘 이성적이었고 누구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 적도 없고 언제나 차가웠다. 겉으로는 미소를 짓고 상냥한 사람이지만 사람이 곁에 오는 것이 싫었다. 사람은 그저 언젠가는 떠날 사람들이니까. 그러니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라고, 스나가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참 잘 살고 있다고.     


이런 스나가 이치조에 대해 그의 숙부 마쓰모토는 이렇게 말한다. 스나가는 “세상과 접촉할 때마다 안으로 똬리를 감는 성격”이라서, “한 가지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회전하여 점점 깊고 촘촘하게 마음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고통을 줄 뿐이야. 끝내는 어떻게 해서든 이러한 내면의 움직임에서 벗어나고자 기원할 만큼 괴로워하지만, 결국 자기 힘으로는 풀 수 없는 저주처럼 끌려 들어”간다. 이것은 스나가에게 있어 “존재의 근원에 가로놓은 커다란 불행”이며 “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려면 안으로 안으로 향하는 삶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서 바깥으로 똬리를 풀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밖에 있는 사물을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사용하는 대신 머리를 통해 밖에 있는 사물을 바라본다는 식으로 눈을 사용하게끔 해야만”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말을 한다.


 “세상에 단 한 가지라도 좋으니까 그의 마음을 훔칠 만한 훌륭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상냥한 사람을 찾아내야만 하는 거네. 한마디로 말하자면 더욱 변덕스러워져야만 한다네.”     


한 번도 애절한 사랑을 해 본 적도 없고 질투도 없으며 사랑의 경쟁자가 있다면 미련 없이 두 손을 놓아버린다고 말하던 스나가. 모든 것은 머리로 생각하며 가슴을 따르지 않았던 그에게 어떤 이는 이렇게 조언한 것이다. 이 책을 읽던 즈음이었다. 지금 내 옆의 그를 만난 것은.      


후회가 필요하다     


나는 이제 후회가 필요하다. 후회를 알고 싶다. 후회를 하고 싶다. 왜 일까. 왜 이제 와서 후회를 알고 싶은 것일까. 김형수 작가는 자신의 책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에서 “인간은 흔들리면서, 뼈아프게 후회하면서, 자기 성찰의 낯 뜨거운 시간을 견디면서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완성되기 위해서는 후회가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가장 많이 산 사람은 가장 오래 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생을 느낀 사람이다.”     


루소의 <에밀>에 나오는 말이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나는 생을 다채롭게 살고 싶다. 꼼꼼히 살고 싶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삶의 순간을 더 자세히, 꼼꼼히, 들여다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있다. 나라는 책을 읽기 싫다며 대충 넘기고 싶지 않다. 그저 마지막 페이지만 알면 된다며 몇 십 장을 대충 넘겨 버리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쓴다. 그래서 나는 후회를 배워야만 한다.      


크리스티나 누녜스 페레이라 외의 <42가지 마음의 색깔>이라는 책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가 나온다.     


“포근함, 사랑, 미움, 화, 짜증, 긴장, 안심, 차분함, 행복, 기쁨, 슬픔, 측은함, 후회, 뉘우침, 부끄러움, 불안, 소심함, 당황, 두려움, 놀람, 역겨움, 반감, 너그러움, 몰이해, 외로움, 고독, 그리움, 우울함, 따분함, 희망, 열정, 신남, 포기, 실망, 좌절, 감탄, 샘, 바람, 만족, 자랑, 즐거움, 감사”     


이 다양한 감정들 중에 나에게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었던 것이다. 다양한 감정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감정을 읽을 줄 알아야 타인의 다양한 감정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어야 타인과 나 사이의 유리막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나는 사람이 고프다는 말을 거부하지 않고 순수하게 말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이외수 작가는 <글쓰기의 공중부양>에서 후회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후회와 자책이야말로 변화와 발전의 가장 결정적 요소다. 우리는 흔히 후회를 부질없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후회라는 동력이 없다면 결코 노력의 증진은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 교육에 있어 후회는 실로 축복과도 같은 감정이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를 위하여, 후회라는 신의 선물을 소중히 존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사람이 고프다는 감정을 거부했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아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처음으로 나에게 사랑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 첫사랑도 떠나보내고 말았으면서도 후회하지 못했다.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겠다며 그게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며 고집을 부리며 오히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후회를 알아야 나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으며 후회를 인정해야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 


 “후회를 해도 우리가 변하지 못하는 까닭은 후회 다음에 반드시 따라와야 할 ‘분석’까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회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후회가 없다면 새로운 가능성이란 존재는 아예 생겨나질 않는다.”   

  

위의 문장은 이외수 작가의 <글쓰기의 공중부양> 중 일부이다. 그렇다. 나는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주고 싶다. 내 안의 고독과 외로움을 더 이상 모르는 척 하지 않고 싶다. 지금 내 곁에는 나의 꽈리를 풀어주는 변덕스러운 사람이 있다.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언어로 모든 것을 읽으려는 나와 달리 그는 몸의 언어로 말한다. 그의 그 언어를 나는 읽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나는 이성적이었고 냉정했고 논리적이었으나 그 앞에서는 철없고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가끔은 이런 나를 내가 감당하지 못해 나 자신이 싫어질 때도 있다.   


후회 없이 살고 싶다     


참된 의미의 후회 없는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여러 책 속에 다양한 표현들이 있지만 이외수 작가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에 나오는 이 문장이야말로 후회 없이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장 ‘알기 쉽게’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후회 없는 인생이란 많은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온 인생이다. 우리는 수시로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눈길을 주면서 그것들에게 사랑을 느꼈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가슴 안에 사랑이 간직되어 있지 않은 인간은 결코 예술을 느낄 수도 없으며 예술을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리하여 후회 없는 인생이 되고 싶다. 많은 것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돌려받지 못할까봐, 내가 준 사랑보다 작은 크기일까봐, 혹은 떠날까봐, 혹은 아까워서 등의 다양한 이유를 들이대며 사랑을 제대로 못할 때가 사실 더 많지 않을까. 그러나 그 이유들의 가장 밑바닥에는 결국 두려움이 있다.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사랑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고 다양한 이유를 들이대며 사랑을 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없다.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방법을 몰라서 그동안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후회한다. 지금도 내 곁에 있지만 그동안 소중하게 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무엇보다 가장 내가 아껴야 하는 나 자신을 아직도 나 스스로가 상처를 주고 있어서 나 자신을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해서 가장 미안하다. 나 스스로를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기에 타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사랑할 줄 몰랐다.     

 

이제는 후회를 알고 후회를 하며 후회를 통해 돌아보며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것들을 사랑하며 생을 가장 ‘많이’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이렇게 나는 오늘도 쓰고 읽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인내를 모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