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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16. 2020

알랭 드 보통 외의 <영혼의 미술관>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책이라 부르고 싶은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행복한 고민이다.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정확한 네이밍이라는 생각과 백과사전 같은 이 책의 겉모습과 책의 깊이가 그대로 일치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겉과 속이 같을 때 주는 안정감은 역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예술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말하는 예술의 정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사실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나에게 예술은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은 자기 인식을 누적시켜, 타인에게 그 결실을 전달하는 훌륭한 수단이다.(p47)”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안에 담긴 근본적인 예술의 존재 이유, 가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은 마음의 단점을 교정한다.(p145)”
 

“예술은 습관에 반대하고, 우리가 경탄하거나 사랑하는 것에 갖다 대는 눈금을 재조정하도록 유도해 그 소중한 것을 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게 우리를 되돌려놓는다.(p59)”     


친구와 박물관에 다녀왔다. 삼국시대, 조선시대 그림과 도자기류가 전시되어 있었다. 천년, 이천 년 전 그림, 도자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보관이 잘 되어 있었다. 여러 그림과 글, 도자기가 있었지만 친구가 아름답다며 오랫동안 바라본 것은 작고 하얀 연적이다. 그 옆에는 중국의 기술이 도입되어 화려한 기법이 들어간 도자기도 있었다. 전시장 한가운데 유리장 하나를 독차지하며 누구나가 먼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던 도자기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마음을 준 것은 여러 도자기들 속에 나열된 작고 하얀 연적이다. 그녀의 카메라에 담긴 그 도자기는 결코 작지 않았고 명암이 적당히 드리워져 당당한 미(美)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내적인 나약함을 보완해줌으로써 우리를 생존의 평균치로 되돌려놓는 예술작품을 갈망한다. 어떤 작품이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를 채워줄 때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하고, 우리를 위협하거나 사전에 압도해버리는 느낌의 분위기나 모티프를 강요하는 작품은 추하다고 일축해버린다. 예술은 내면을 완전하게 채워주기로 약속한다.(p34)”     


그림이든 도자기든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내 안에 있던 결핍뿐 아니라 사랑이 이끈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타인 혹은 다른 무언가에 들어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없는 것을 다른 대상에서 만났을 때,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나의 결핍이 채워짐을 느낀다. 친구가 그 작고 여린 연적에 마음을 준 것은,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삶의 평온, 안정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미 그녀 안에 그러한 평온과 안정이 들어 있기에 그녀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을 그 연적 안에서 발견하고 마음을 주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그래서 우리 곁에 어떤 예술작품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들어맞는 답은 없다. 해답은 우리의 내면에 어떤 불균형이 존재하고 우리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먼저 자기 내면의 지형을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p140)”     


예술이란 무엇인지, 왜 예술이 필요한지 정답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필요한 이유는 위의 문장이 말해 준다. 나에게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내 안의 결핍을 예술이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의 목적     


저자에 의하면, 예술은 도구다. 도구란 것은 소망(불편한 점을 해소해 주는)을 이룰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므로, 예술은 곧 우리 안의 불편한 점, 심리적 취약점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심리적 취약점에는 7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기억, 희망, 슬픔, 균형 회복, 자기 이해, 성장, 감상’이 그것이다. 중요한 점이라 생각되어 하기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1. 기억: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중요하지만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경험을 좀처럼 붙들고 있지 못한다.

2. 희망: 우리는 희망을 쉽게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삶의 나쁜 면들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3. 슬픔: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일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없기 때문에 고립감과 피해의식에 쉽사리 이끌린다. 

4. 균형 회복: 우리는 균형감이 없는데다 자신의 가장 좋은 면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단 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다수의 자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보다 나은 자아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보다 나은 자아를, 대개는 우연히 그리고 너무 늦은 때에 만난다. 

5. 자기 이해: 우리는 어렵게 깨닫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수수께끼이며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타인에게 설명하거나, 내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사랑받는 일에 대단히 서툴다.

6. 성장: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많은 경험, 사람, 장소, 시기를 거부한다. 이는 그런 것들이 잘못된 포장에 싸인 채 다가오고 그래서 그것과 연결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7. 감상: 우리는 친숙함 때문에 둔감해져 있으며, 화려함을 부각시키는 상업 지배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는 게 단조롭다며 불만족에 빠진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고민이 우리를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이 7가지 중 마지막의 감상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감상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의 주된 결점,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주위에 늘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해 고생하고, 매혹적인 것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종종 엉뚱한 갈망을 품는다.

문제의 한 원인은 상황에 익숙해지는 우리의 능력, 즉 우리가 습관화라는 기술의 달인이라는 데 있다. (...) 그러나 습관은 꼭 그만큼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쉽다. (...)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덜 중요한 것들을 삭제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줄 수 있는 요소들을 삭제하고 만다.(p59)”     


즉 여기서 말하는 감상이란 놀라고 기뻐하고 감동한다는 의미의 감탄(appreciation)이 아닐까 생각한다. 항상 곁에 있기에 당연하다 여기며 소중함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의 속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저자가 말하는 7가지에 대해 하나씩 곱씹어 본다. 그가 말한 인간의 심리적 취약점은 곧 나의 취약점이기도 하다. 나의 기억은 선택적 기억이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중요한 것을 놓칠 때도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나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먼저 생각한다.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바라본다. 나에게 닥친 어려움은 실제의 크기보다 더 크게 보여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내 안에 여러 자아가 있음을 인정하기까지 나는 몇 십 년이 걸렸고 지금도 나는 완벽한 나가 되려고 노력한다. 물론 완벽해질 수 없기에 결국 또 다시 좌절하고 만다. 나는 내가 가장 어렵다. 나를 안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나는 나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며 나를 고정하기에 변화를 거부하고 변할 수 없다고 단정 짓기에 성장하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저자는 말한다. 바로 이 일곱 가지 심리적 취약점과 예술을 연관시킬 때 예술은 도구로서의 목적과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예술의 진정한 목적     


사람들은 보통 어떤 식으로 사람을 기억할까. 나는 책과 문장, 그리고 그 순간의 장면으로 기억하곤 한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에 대한 이 책의 결론은 나로서는 반전에 가까웠다. 예술이란 이러이러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필요하다’가 아니라 ‘필요성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러한 반전 결론은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친구와 박물관 안에 있던 정원을 걸으며 이 책 이야기를 꺼냈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예술이 덜 필요하고 덜 예외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그 세계에서는 오늘날 사람들이 미술관의 격리된 전시실에서 발견하고, 찬양하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가치들이 온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한다면서도 사회가 언젠가는 예술 때문에 야단법석 떨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내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p232)”     


길지만 위의 문장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 생각되어 모두 적어 보았다. 저자의 말을 곱씹어 본다. 맞다. 나는 친구와 격리된 전시실 속 예술품을 만나러 박물관에 갔고, 전시실에 쓰인 예술품에 대한 찬양의 글을 돈을 내고 읽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와 내가 감탄하듯 정신없이 사진을 찍은 것은 박물관 앞 정원에 있던 나무들이며 나뭇잎이다. 아무렇지 않게 서 있던 나무들이 내 기억 속에는 여전히 더 오래 남아있다.    

  

나무의 기둥이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바라보다 사진으로 남겼는데, 알고 보니 그 나무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모과나무였다. 어떤 책에서 모과나무에 대한 설명을 읽은 후로 내 안에서 그 나무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서 나는 그것을 만난 것이다. 인위적인 물감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빛깔의 낙엽들. 누군가에게는 낙엽이 치워야 할 쓰레기일지 모르지만 그녀와 나에게는 그날의 그 시간을 담고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저 문장은 그날, 그 시간, 함께 걸었던 그 박물관 앞 정원에서 내가 그녀에게 말한 책 이야기다. 이 문장은 이제 그녀의 문장이 된다.      


“좋은 연인이 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는 생각에는 값싸고 부조리한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는 듯 느껴진다. (...) 사랑에 빠져 하는 행동을 인식하지 않을수록, 그런 행동에 대해 학습하지 않았을수록, 더 존중하고 신뢰할 만한 연인으로 인정받는다.(p107)”     


저자가 말한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란 것은 예술이 유별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하는 남자가 하는 행동’이란 것에 얽매이면 정작 내 앞의 그 사람이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언어를 읽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술의 목적, 수단, 가치, 저자의 견해에 신선함을 느끼며 수긍한다. 그러나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림이나 음악 이런 것들이 그나마 나에게 가까운 예술이라면, 내가 그것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없다. 그저 나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뿐이면 된다. 친구와 오랜만에 걸었던 낙엽길과 함께 바라본 나무, 집에 가는 길에 만난 졸고 있던 동그란 얼굴의 고양이,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예술이 된다. 그것이면 나에게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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