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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18. 2020

김명훈의 <지금 감은 두 눈이 다시는 떠지지 않기를>

삶이란 무엇인가     


한 친구는 말했다. 내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철학책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또 다른 지인도 말했다. 내 삶의 방식이 정답이기에 철학책은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그들의 말을 들은 후로 가끔 생각한다. 나는 왜 철학책을 좋아하는가. 왜 마음이 끌리는가.      


아마 나는 조심스럽게 살고 싶어서 철학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나보다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생각들을 통해 삶이란 어떤 것인지 미리 엿보고 지금의 나와 비교해 보며 나는 잘 살고 있는 거야, 혹은 아 이 부분이 부족했구나, 하며 살얼음 위 같은 삶을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던 것 같다.      


“삶이란 내게 고통이며 늘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 관계는 의미가 없고 아프기만 했으며 내 역겨운 존재는 나를 무너뜨린다.(p16)”     


저자의 위의 문장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삶이란 고통이며 갈증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묻곤 했다. 왜 살아야 하느냐고. 존재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사람은 왜 사는 걸까? 왜 굳이 살아야 할까? 이런 고민도 하지 않을 무(無)의 상태였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그럼에도 우린 살아 있기에 이 질문에 답할 수밖에 없다.(p19)”     


존재의 의미, 살아야 할 이유를 나 자신에게 따지고 물으며 스스로를 괴롭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사람들, 불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나는 나를 괴롭히는 행위임을 알면서도 나 자신에게 이유를 말하라고 다그치고 만다. 이런 내가 잘못된 것인지 싶어 책들을 찾곤 한다.     

 

사람들은 입으로 내뱉는 말에는 깊은 무게를 두지 않는다. 입으로 나오는 말들은 말 그 자체의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가볍다. 창밖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혹은 술을 마셔서, 흘러나온 음악이 좋아서 등등의 순간순간의 이유로 인해 원래 그 말이 가진 말과 왜곡되어 나올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허공을 떠다니는 말보다는 고정되어 있는 말인 글이 안심이 된다. 내 생각 또한 글로 새겼을 때 진짜 나의 생각이 되는 것만 같다.     


“난 늘 사람에 목말라했다. 역겨운 사람들이 싫었지만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이런 모순적 갈구를 야기했다.(p52)”


삶이 고통이며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며 외로움을 달고 사는 사람.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들은 세상을 싫어하고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사랑해서 외로운 것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래, 라는 말을 나는 싫어한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책 <전체주의의 기원1>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는 일은 (...) 정치적 자유가 있는 곳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 불행히도 생각하도록 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 폭정과 전체주의 아래에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      


그녀의 말에 공감한다.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명령대로 행동한 아이히만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몰랐다. 만약 아이히만이 상부의 명령이지만 같은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도 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고 고민을 했다면, 그는 분명 그 시대를 살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음은 분명 ‘편한’ 일이다. 가끔은 나도 나에게 말한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그냥 모르는 척하고 못 본 척하고 아닌 척하면 너는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어’라고. 그럼에도 나는 고집이 세서 그 말을 듣지 않고 결국 나 자신을 괴롭히고 만다. 나는 내가 가장 어렵다.     


버리다     


나는 버리기 위해 무언가를 사용한다. 줄어드는 화장품의 양을 보며 버리는 순간을 기대한다. 낡아지고 헤지고 있는 양말을 보며 버리게 되는 그날을 꿈꾼다. 내가 버릴 수 있는 것, 버림을 통해 나는 내 안에 있던 어두움도, 삶의 무게도 함께 버리는 것만 같아 버리는 그 순간을 기대하고 만다.    

 

“어려서부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자주 학교를 옮겨 다녔다. (...) 이런 알 수 없는 감정이 쌓여 지친 내가 뭔가 놓고 싶을 때마다 학교를 놓은 것뿐이다.(p15)”    

 

예전에는 사람을 버렸었다. 지나치게 다가오는 사람을 버렸다. 소중한 무언가를 버림으로써 내가 아파해도 되는 당당한 이유를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옳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서 지금은 혼란스러울 때면, 버려도 되는 물건을 찾는다. 미련을 두고 끌어안고 있던 것들을 혼란스러운 감정과 함께 내어놓는다. 그렇게 내놓고 나면 감정이 안정이 되었는가 하면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걸 보면 그 버림이라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삶이란 얇게 언 호수 위를 걷는 것과 같다. 불행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커다란 행복은 혼자 오지 않고 커다란 고통과 함께 온다. 기쁨 옆에는 언제나 슬픔이 따라 오고 기대는 불안감을 데리고 온다. 그 두 가지를 모두 끌어안아야 이 삶이 성립된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이 살얼음 위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랑,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종이로 건네받은 우울을 떠올린다. 몇 년 전 아는 언니에게 파울로 코엘로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베로니카는 자살을 기도하다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20대 여성이다. 그녀가 자살을 시도한 이유 중 하나는 더이상 달라질 것이 없는 현실, 지극히 평범한 반복되는 하루에 대한 싫증이다. 나는 사실 그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읽고 싶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종이로 건네진 우울함과 무기력함은 생각보다 무서웠다. 또한 권태의 무게에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한 주인공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읽기를 거부한 것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주인공 베로니카에게 권태가 찾아온 것은 어쩌면 꿈을 이루기 위해 미치도록 노력했음에도 그 노력이 허무로 돌아가는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여기며 찾아온 감정일지도 모른다. 우울함이나 무기력함의 감정은 내 안에 숨겨둔 감정이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그래서 그 책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거부하고 싶어진 것일 게다.     


“정말 내 정신병은 모두 사랑의 결핍이었을까? 확언할 수 없다. 난 아직도 결핍이 현현한 세상이 증오스럽고 이해 못 할 슬픔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p281)”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책에서 나의 어두운 감정들을 만난다. 내 어두운 감정들 탓에 책을 읽으며 역겹다는 단어를 떠올렸다. 이 책의 3분의 1을 읽던 쯤에는 모든 것은 사랑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양육자가 아이를 온전히 사랑하고 내가 세상을 온전히 사랑하면 생기지 않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이 오만했다.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랑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은 분명 많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삶을 견디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책 <삶을 견디는 기쁨>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각자에게는 생과 사를 가늠할 정도로 중요한 과제를 저마다 안고 있다. (...) 그런 문제점들은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이며, 그것은 그저 우리에게 고통 그 자체만을 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곧 우리의 삶이 되며, 기쁨이라는 감정과 삶에서 느끼는 고귀한 가치는 오직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잔인하지만 내가 찾아헤맨 답 중에서 가장 수긍이 가는 말이다. 삶은 고통이지만 이 고통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헤세는 삶을 ‘견딘다’라고 말한다. 그 고통 자체가 우리의 삶이며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고귀한 가치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아마 삶을 사랑하는가 보다. 그래서 이렇게 기대하게 되고 기대를 이루어주지 못했을 때 실망하고 상처받고 좌절한다. 사랑이 커서 고통도 크다. 고통이 크기에 버리고 싶지만 사랑하기에 버릴 수도 없다. 고통과 함께 온 이 삶을 나는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끌어안을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더욱더 고통스럽다. 그래서 이 삶을 견디기 위해 쓴다. 쓰고, 읽고, 쓰고, 읽으며, 삶을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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