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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23. 2020

사랑에 대한 단상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

# 결핍과 결핍이 만나다


글쟁이들의 대부분의 꿈은 아마도 글로 사랑을 고백받고 글로 사랑을 고백하는 게 아닐까. 그들에게 있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도구는 글이므로 그 어떤 도구보다 예민하고 섬세하게 다가올 것이다. 신형철 작가는 자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서문에서, “이 책에 실린 글 중 하나를 나는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썼다.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랑이 어째서 영원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은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연민도 사랑이라고 한 친구는 말한다.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동감은 한다. 한 사람이 나의 시선에 들어오고 자꾸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되고 옆에 있어 주고 싶고 그에게 없는 무언가를 채워 주고 싶은 마음. 그것은 사랑과 닮아 있다. 아니, 사랑을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기에 그것 또한 사랑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 경계는 넘기 위해 존재한다


그는 붉은 색이라면 나는 파란색이다. 그와 나는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다. 나는 늘 이렇게 그와 나를 구분짓는다. 그리고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위해 '노력'하며 '이해'하기 위해 그를 분석하고 설명한다.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다르다. 그는 그저 나를 바라본다. 마치 나와 나란히 앉은 자리가 좁다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자신의 한쪽 엉덩이를 살그머니 들어 내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다. 반면 나는 왜 우리의 자리가 좁은가를 생각하고, 분석하며, 이유를 찾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나를 나 그대로 둔다. 나를 바꾸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다. 반면 나는 그를 나의 틀 안에 넣는다. 내 틀 안에 넣고 해석하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여기서 나의 사랑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장벽을 없애는 것입니다."


위의 이 문장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의 <인생수업>에 나오는 구절이다. 처음 이 문장을 만났을 때는 완전히 소화할 수 없었다. 막연하게는 이해가 되지만 완전한 수긍은 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책에서 경계에 대한 구절을 읽다 마음이 멈춰버렸다. 정말로 멈춰버렸다. 그 문장을 읽자마자 손이 멈추고 몸이 멈추고 사고가 멈추어버렸다.

그 저자는 경계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경계란 어디까지나 뛰어 넘는 것을 전제로 하며, 경계의 양쪽에 있는 두 가지가 서로를 효과적으로 도움을 주게 된다. 경계에 대한 그 생각은 나에게 충격에 가깝다. 극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경계의 양쪽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저자의 관점. 이 문장 앞에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가만히 벽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 있어 경계는 구분이며 다름이며 한계다. 내 안의 경계는 단정이며 불가능이다. 그리고 너와 나의 경계는 다름이며 극복할 수 없는 차이였다.


가끔 나는 이렇게 낯선 생각 앞에서 정신없이 흔들리고 만다. 소용돌이치듯 내 안에서 많은 감정들이 몰아친다. 나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도 없다. 그러나 이것을 그냥 버릴 수도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멈추어 버린다. 낯선 생각이 던진 내 안의 파문을 무언가로 남기기 위해 스케치북을 펼친다.


그의 색과 나의 색을 꺼내어 두껍고 거칠게 칠한다. 머릿속 그의 색은 붉은 색이었지만 정작 그림으로 나타난 그는 파란 빛이 된다. 머릿속 나의 색은 짙은 파랑이었지만 그림 속 나는 어두운 갈색이다. 머리가 아닌, 마음이 느끼는 내 안의 그는 파란 빛이며 내가 보는 나는 나무를 닮은 색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의 색을 칠하고 나의 색을 칠하고 그와 나의 경계를 바라본다. 나에게서 나간 빛깔이 그에게 닿아있다. 나는 나 자신의 본래의 빛을 잃지 않은 채 나의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또한 자신의 빛을 잃지 않은 채 그의 빛을 발하고 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서로에게 있었지만 있었는지조차 모르던 빛깔이 우리 사이를 메우고 있다. 그것은 그와 내가 만나 만들어낸 색이다. 그렇게 그의 빛과 나의 빛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그림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그를 사랑함으로써 다채로운 빛깔을 띠게 되었다고.


# 사랑의 관한 정확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는 지금, 내가 내린 실험의 결과는 이것이다.


'결핍과 결핍이 만나 각자의 결핍이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할 수 밖에 없다.'


신형철 작가의 말대로 결핍과 결핍의 만남은 영원한 사랑의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랑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하여 실험 중인 지금의 내가 내린 결론은, 결핍과 결핍이 만났지만 우리의 결핍은 결핍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이 부분이 신형철 작가와 나의 차이점이 된다) 더 이상 결핍이 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각자의 결핍을 채운 것은 상대 자체가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가 있었기에 나의 결핍이 사라진 것은 당연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결핍은 나 자신의 힘으로 채워진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그를 '정확하게 사랑함으로써', '진정으로 무언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됨으로써', 나 자신의 결핍을 메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내가 만약 나의 책으로 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처음 내가 그에게 마음이 간 것은 결핍이었다. 그의 결핍과 나의 결핍이 서로를 끌어당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내가 채워주지 않아도 충분히 완전한 존재이다. 나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됨으로써,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로 인해, 홀로 설 수 있는 완전한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자가 되었기에,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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