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Nov 03. 2020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낸 편지>

가로, 세로 30센티미터, 높이 약 50센티미터의 상자가 있다. 그 상자에는 다양한 색깔이 종이가 들어 있다. 이 문장만으로 끝난다면 그 상자도, 그 종이도 모두 ‘무의미’가 되고 ‘평범’이 되며 ‘이름 없는 존재’로 끝난다. 그 종이들에는 시간이 들어있다. 짓궂은 농담이 섞인 초등학생 특유의 크리스마스카드. 교복 입은 여중고생들이 아무렇게나 흘겨 쓴 쪽지, 수십 명이 돌려 쓴 롤링 페이퍼, 글씨를 막 배운 조카의 비뚤비뚤한 글씨로 채워진 편지,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첫사랑의 첫 마음. 그곳에는 나의 사람들이 있고 나의 현재가 있다. 나의 역사가 있다.


편지. 나는 편지가 좋다. 선물보다도 마음이 묵직하게 담긴 편지가 좋다. 나의 편지 상자에는 참 오랜 시간이 들어 있다. 가끔씩 현재가 흔들릴 때는 그 상자를 열어 흐릿한 나의 존재에 색깔을 입히곤 한다. 그 편지들로 인해 숨을 쉬게 될 때가 있다. 그 상자에는 타인의 손글씨가 담긴 편지뿐만 아니라 내가 나에게 쓴 편지도 있고 내가 누군가에게 보냈어야 하는 편지도 있다. 주인에게 가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 글은 나를 향하고 있었는지, 지금에 와서는 알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무언가는, ‘편지’라는 그 단어 하나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편지’라는 것에 대한 나의 오랜 애정, 꿈이 이 책을 나에게 소개해준 거라 생각한다.


저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이자 언론인이다. 이 저자에 대해서는 사실 전혀 모른다. 그저 다른 책에서 인용된 이 책을 보고 읽게 된 것뿐이다. 저자는 이십대 중반에 아내와 결혼했다. 그가 글에 집중하는 동안 아내를 충분히 사랑해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는 내용이 편지, 즉 이 책에 담겨 있다.


나는 더 이상 실존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온 주의를 기울입니다그리고 그걸 당신이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노후에 불치병에 걸린 아내에게 남은 생을 바치고자 결심한 저자가, 아내를 향한 그동안의 미안함과 사랑을 담은 책이다. 실제로 2007년 9월 22일 부부는 동반자살 했다. 아내가 없는 세상에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게다.


처음으로 열렬히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그리고 그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것은 누가봐도 너무도 평범하고 사적이고 흔한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그의 책 속에 넣을 수 없었던, 혹은 일그러진 여성의 모습으로밖에 묘사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말대로, 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했던 것. 그리고 그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 너무나 평범하고 사적이고 흔해 빠진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흔한 그 일을 평생 겪어보지 못하거나 그 사랑이 맺어지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한 그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당신이 느꼈을 혼란과 고독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만약 그런 것이 사랑이라면그런 것이 한 쌍의 부부라면차라리 혼자 살면서 절대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게 낫겠다고 당신은 속으로 다짐합니다부모가 주로 돈 문제로 싸우는 것을 보고는진정한 사랑이 되려면 돈을 무시해야 하는 것이라고 혼잣말을 했지요.

일곱 살에 이미 당신은 그 어떤 어른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중략어른들의 세계에 당신의 자리는 없었습니다당신은 강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중략난 항상 당신의 힘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 밑에 숨은 당신의 연약함도 느끼곤 했습니다당신이 극복해낸 그 연약함을 난 사랑했고당신의 연약한 힘에 놀라곤 했습니다우리는 둘 다 불안과 갈등의 자식이었습니다우리는 서로 보호해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었습니다이 세상에서 있을 자리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애초부터 우리에겐 없던 자리를 말입니다.”


이 책의 서평을 미루고 싶을 만큼 부러웠던 이유는, 책 속의 표현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가진 말들이기에 그 말들 자체가 가진 매력이 부러웠고 그 말들 하나하나에 담긴 마음의 깊이가 부러웠다. 그 말 속의 마음이 책속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달고 날아와, 시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향기를 뿜고 있다. 지금 그 향기는 내 가슴에 내려앉았다. 아마 이 말들이 가진 깊이와 향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그 여행을 이어나갈 것이다. 앞으로도 이 책은 계속해서 살아남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온기를 전해 줄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상상하며 글로 쓰는 지금, 내 마음마저 따듯해진다.


마음과 마음이 닿는 사람을 만나는 것 그 하나만으로는 평생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다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글로 세상과 소통까지 한 사람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을 살게 했던 그 글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세상에 고백하고 있다.


나는 늘 한 가지를 선택하느라 주춤거리고 고민하고 고민하며 우유부단하게 살아왔다. 한 가지밖에 갖지 못하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글쓰기와 같은 자신의 숨 쉴 수 있는 공간, 일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진심이 통하는 깊은 사랑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를 가지는 건 지나친 욕심이라 생각했다.


당신은 말하곤 했지요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과 살고 있다고또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홀로 밤이고 낮이고 어느 때건 메모를 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중략내가 몽상가처럼 오래오래 말이 없으면당신은 이따금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당신 머릿속의 생각을 내가 알 수만 있다면...’ 하지만 당신 역시 그런 적이 있었으니 내 머릿속 상태를 모를 리 없지요홍수같이 넘쳐흐르다 단단한 결정이 되어 제자리를 찾아가는 단어들끊임없이 단련되는 문장의 조각들암호나 상징으로 기억속에 고정시키지 못하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어렴풋한 생각들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글 쓴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지요. ‘그러니 어서 써요!’”


글쓰기를 호흡처럼 여기는 사람에게 있어,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인 자신의 글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기쁨과 환희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흘이나 말을 걸지 않았다고 말하던 아내. 그러나 그런 저자를 누구보다 마음 깊이 이해하고, '그러니 어서 써요'라고 말해주던 아내.


문득 생각해본다.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아내. 이제 와서 고마움과 사랑을 표현하는 남편이라고 아내는 다그쳤을까. 며칠이나 글에 빠져 있던 남편으로 인해 평생 외로웠다고 아내는 원망을 품고 있을까.

그의 아내만이 그 답을 알고 있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만난 그의 아내는 남편으로서의 저자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남편도 사랑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글에 빠져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남편 또한 품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자신을 향하고 있던 그 아내에게 저자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남긴 글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모든 삶의 판단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지 않는 한,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란 언제나 진행 중이기에 우리는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내일도, 1년 후도,10년 후조차도 아직 이르다. 모든 것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과거의 현재, 그 한때에 대해 해석할 수 있고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저자의 설익은 마음도 아니요 절정의 아름다운 시기도 아닌,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에게 여운을 주는 것이리라.


“‘당신을 내게 줌으로써 를 내게 준 사람에게.”


저자가 <배반자>란 책을 아내에게 바치며 쓴 문구이다. 당신을 내게 줌으로써 나를 내게 준 사람. 충분히 사랑받았음을 표현하는 이 말. 충분히 사랑해 주었음을 느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또한 충분히 사랑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이 말을 내 피부가 느껴보고 싶다. 이 말을 내 가슴으로 말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그 어느 때보다도 더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여든 두 살에 듣는 이 사랑의 고백. 어떤 느낌일까. 백발이 되어 젊은 날 사랑했던 그 사람에게 다시 사랑에 빠지는 느낌, 어떤 느낌일까. 젊음의 아름다움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세월과 깊이, 신뢰. 그 외 지금의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사랑. 애달픔, 설렘, 온기.....


문득 조심스럽게 꿈을 꿔본다. 소망해 본다. 평생을 함께 한 사람에게,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사랑합니다’라는 이 말을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저자와 그 아내의 만남의 시작은 드라마에서 나오듯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고 극적이지도 않다. 그저 서로 인연이란 것을 서로가 느꼈을 뿐이다. 그것이 정말로 인연인지 순간적인 호기심인지 그때는 알 수 없다. 평생을 함께 하고 마지막 순간 곁에 있을 때 비로소 처음 그 순간의 끌림의 의미와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란 두 주체가 서로 매혹되는 일즉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면사회화할 수 없는 면사회가 강요하는 자기들의 역할과 이미지와 문화적 소속에 거역하는 면에 끌려 서로에게 빠져드는 일이라고 말입니다우리는 출발할 때 가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을 둘이서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대로 살겠다고그리고 당신의 눈길과 목소리와 향기와 가는 손가락과 당신이 당신의 몸으로 사는 방식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겠다고 동의하는 것만으로 미래는 온통 우리에게 활짝 열리게 되어 있었지요.”


OMR 답안지 뒷면도, 카페의 티슈도 그 안에 한 사람의 마음이 글자로 새겨지는 순간, ‘의미’라는 옷을 입고 편지가 되어 다시 태어난다. 무의미가 의미가 되는 순간이다. 나는 모든 종류의 편지를 사랑한다. 가끔은 편지를 쓰기 위해 책을 선물한다. 내 가난한 글로는 채울 수 없는 마음의 무게를 책의 힘을 빌리는 게다.

매해 생일이면 나는 나에게 편지를 선물한다.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내가 너에게 말을 걸듯 나에게 말을 건넨다.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마음이다. 그 마음이 글자로 새겨진 편지를,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


저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아내의 삶의 끝자락을 아련하게 느끼던 그때 아내에게 바친 이 책은 시작하는 연인들의 뜨거운 러브레터보다 더 뜨겁고 깊이 있다. 젊음이라는 외적인 요소가 사라진 이후, 내면의 사랑을 건네는 저자의 편지이기에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가난한 나의 표현으로는 담을 수 없는 크기의 아름다움이다.

작가의 이전글 관계 - 점, 선 그리고 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