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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pr 18. 2021

송귀예의 <그림책으로 읽는 감정수업>

결혼하니까 좋아? 오랜만에 지인을 만날 때면 항상 듣는 말이다.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나의 첫 대답은 똑같다. 이 사람을 만난 이후로 우울증이 사라졌어, 라고. 약을 먹을 정도의 우울증은 아니지만 감정기복이 심한 편이기에 한번 우울함이 찾아오면 바닥까지 내려간다. 더구나 타인의 감정에도 쉽게 동화된다. 마치 스펀지가 주변의 물기를 흡수하듯 타인의 슬픔도 내 안에 고여버린다. 그런 감정의 무게가 항상 너무 무거웠다.      


지인들의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 알게 된 것이지만 사실 나도 이유는 모르겠다. 그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하는 사람인 건 맞다. 하지만 웃는 일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크게 싸울 때도 있고 나에게 상처 줄 때도 있다. 나 또한 그에게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생각해 보니 그와 만난 이후 우울함이란 감정을 잊고 있었다.      


감정을 들여다보다     


내가 감정이라는 것을 들여다보게 된 것은 아마 이 우울함 때문일 것이다. 언제부터 우울함이 있었냐고 지인이 물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라고 나는 대답했다. 가족들이 읽지 못하게 꽁꽁 싸매던 일기장 속에는 나의 감정들이 들어 있었다. 가족에 대한 분노도 들어 있었고 나 자신에 대한 분노도 들어 있었다. 마치 쓰레기통 같았다. 그렇게라도 버리지 않으면 내 감정에 내가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나에게 쓴다는 행위는 호흡과 같다. 살기 위해서다. 내 감정에 의해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게 쓺이라는 행위를 통해 감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선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그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감정 단어를 많이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름이란 존재의 표현이다. 연인에게 지어주는 애칭 또한 마찬가지다. 나와 그만 아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서로는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자신의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이름을 가진 감정은 하나의 존재가 되고 그 감정은 더 이상 ‘나’가 아니게 된다.       


감정과 나를 분리하다     


감정이 내가 아니고 생각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일까요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게 되면 자유로운 당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감정 들여다보기 단계 이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감정과 나를 분리하는 과정이다. 사실 나는 이 과정이 아직도 어렵다. 감정이 내가 아니라면 그 감정은 무엇인가, 그 감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현재 우리가 어떤 사건을 만나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은 과거 나의 경험으로 인해 형성된 일들이 대부분입니다과거의 일들이 해소되지 못하여 미해결과제로 남아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감정이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우리 안에 새겨진 하나의 기억이 아닐까 싶다. 그 기억이 긍정적이라면 좋은 감정이 되겠지만 부정적으로 남아있다면 슬픔, 분노, 화, 우울함 등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응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자신과 그 감정을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감정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감정을 자신과 분리하기 이전에, 그 감정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기 어렵다.      


한 사람이 있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은 그에게 어른들은 울지 말라고 했다. 그것이 장례식장에서 어른들이 그에게 한 말이었다. 이후, 그는 죽음 앞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렸다. 그는 그렇게 울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슬픈 영화도 보지 않는다. 형제도 없는 그가 세상에 혼자 남게 되었음에도 장례를 치르는 그 날, 그 아이에게 어른들은 울지 말라고 했다. 슬퍼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울 수 있는 어깨를 내어 준 이도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인플루엔셜, 2020)의 정재찬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슬픔을 이렇게 표현한다. “슬픔은 내 몸을 잠시 빌려 사는 기생충 같은 거”라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슬플 땐 슬퍼합시다.”라고. 슬플 땐 슬퍼한다는 것은 참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자라지 못한다. 울지마, 그만 울어,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다들 힘들어, 운다고 해결되지 않아.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어릴 때부터 감정을 부정당한 채 어른이 된다. 위로,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거부당한 채 어른으로 살아간다. 감정을 표현해도 들어주지 않고 공감해 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점점 멀어지게 되고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고 만다.      


감정을 품어주다     


자신의 감정을 알고 그 감정과 나를 분리하여 그 감정의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다면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 자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감정을 존중받는 경험을 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감정을 존중받기는커녕 오히려 야단을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면 감정을 느낄 상황이 와도 무감각해져 방향을 찾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게 됩니다우리의 감정은 내가 무언가를 할 때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 나에게 찾아온 감정은 공허함이었다. 가슴 안에 채워지지 않는 커다란 구멍이 난 것만 같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허무함인 것 같기도 했고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에 대한 반성에서 오는 무게감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원인도 해결책도 모른 채 이름도 모르는 그 감정을 참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배움이었다. 그동안 알고 있던 지식들로는 앞으로의 내 삶을 꾸려나갈 수 없다. 기존의 지식은 이제 너무 낡아버렸는데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마음공부가 필요했고 직업 측면에서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도전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런 변화에서 오는 불안함과 초조함이었다. 이 감정들의 이름을 알고 나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명확해진다.      


우리가 외로운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찾아온 마음의 구멍. 그 구멍이 나에게 알려 준 것은 내 마음을 내가 제대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하고 과거의 지식으로 현재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차이가 나를 공허하게 만들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학벌도돈도명예도실력도 모두 내려놓는다고 생각해봅시다그런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십니까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무기력해 보일 수도 있겠네요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그 모습을 인정해줄 수 있을까요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아도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한 듯 보여도 나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까?”     


지금의 남편을 만난 이후로 우울함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기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난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사랑이 아무리 커도 내 우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무엇이 내 우울함을 사라지게 했는지 생각해본다. 어쩌면 지금 내 옆의 그는 내 감정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어야 자신도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어서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그런 태도가 어쩌면 나를 비로소 삶에 뿌리내리게 하고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이 바로 여기라고 안심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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