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Oct 17. 2020

니컬러스 에플리의 <마음을 읽는다는 착각>

공부를 하는 이유,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얼마나 ‘모르는가’를 깨닫기 위해서 배움을 계속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얼마나 눈뜬장님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최근 나의 마음의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생각 중 하나는,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모르는가, 얼마나 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일기를 쓰고 그리고 사람을 만난다.


이 책의 요지는 굉장히 간단하다.


실제로 우리는 가족과 친구이웃동료경쟁자주민들의 마음을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중략이 같은 이해의 부족은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마음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p16)”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타인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의 하나의 큰 중심생각이다. 물론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보다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을 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이 중심생각은 그렇게 신선하지 않을지 모른다. 여기서 이 생각을 신선하게 만드는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식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유일한 차이점은 다른 사람의 마음은 추측을 통해 짐작하는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자기 자신의 마음즉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원인과 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자신만 안다는 생각은 착각인 것으로 보인다.(p65)”


타인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는 것.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보다 더 많이 모른다는 사실이다. 내 기억이 옳다면, 아마 최근에서야 나는 '나를 잘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마음은 나의 것이라 생각했고 나는 나의 이성으로 판단하며 이성의 잣대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나는 나의 마음에 대해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이 사실은 더 많으며, 내 행동에 대해 이성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조금은 충격적이기도 한 깨달음이다.


가장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고 나와 함께 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잘 알고 있고 내 행동에 대해 내 머리는 모두 알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는 거만이고 오만이며, 나 스스로가 나에게 부여한 한계선이 되기도 했다는 것을 최근에야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이 책속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이 사실이 바로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를 설명해 준다.(p172)”


내가 나 자신을 잘 모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가 안다고 믿었던 타인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이 의문에 대해서, 저자의 지인의 이야기를 통해 돌아보면 어떨까 한다.

우리는 렌즈를 통해서 보고 있다. 렌즈 자체는 없을 수 없다.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누구나가 착용하게 되는 당연한 창문이다. 문제는 그 렌즈가 얼마나 올바르게 세상을, 나를, 타인을, 보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내 친구가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강연을 듣는데 발표자가 프레젠테이션의 초점이 맞지 않는 것도 모른 채 발표에 열중하는 모습이 굉장히 안타깝더라는 것이다. (중략그런데 발표가 끝나고 보니 프로젝터의 렌즈는 멀쩡하고 자기가 낀 렌즈에 문제가 있었더라는 것이다흐릿한 슬라이드는 친구에게 안경이 필요하다는 첫 징후였다.(p164~165)”


고정관념, 편견, 아집, 혹은 안다고 믿는 것에 대해 이보다 더 적절한 사례가 있을까.

나는, 혹은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한 일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니까, 라는 논리적인 이유를 댄다. 그런데 과연 그 이유는 타당한가, 내가 보는 대로 정말로 모두 그렇게 보고 있는가.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단초는 어쩌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혹은 적어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자주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p68)”고.


내가 정말 옳은가, 나는 정말 나 자신을 알고 있는가, 타인에 대해서도 나는 그 사람을 정말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품는 것.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나 자신을, 타인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나 자신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하고 알 수 있을까. 바로 이 점이 중요할 것이다. 실컷 틀린 것만 빨간펜으로 체크만하고 가버리면, 틀린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향도 제시해 주지 않고 틀렸다는 지적만을 남기고 떠나가 버린다면 그건 너무 잔인하다.

다행이다. 저자는 답을 찾으라고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다. 저자가 제시한 답은 이것이다.


타인의 마음은 절대 펼쳐진 책 같을 수 없다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비결은 상대의 보디랭귀지를 해독하는 능력이나 관점을 수용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끔 공들여 관계를 맺는 것이다. (중략부부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상대의 마음을 넘겨짚을 때가 아니라함께 스스럼없이 생각을 나누고 서로 이해한 바가 맞는지 확인할 때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중략타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고 싶을 때 인간의 감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더 많이 듣는 것이다.(p274~275)”


한 마디로 ‘대화’이다. 비록 효율적이지 못할지 모르지만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알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알아가려는 노력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더 많이 들으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 자신에 대한 앎의 노력도 마찬가지일 게다.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관계라고 해서 '나는 그를 알아' 라고 단정 짓지 말고 ‘귀 기울여 더 많이 듣는 것’, 그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참 시시한 결론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시한 결론을 우리는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얼마나 실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게 하고 있고, 할 수 있다고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겠다. 제대로 듣기 보다는 내뱉은 말이 더 많은 날이 사실은 더 많고, 상대의 말보다는 내 말을 더 많이 기억하는 날이 더 많다. 듣고 있지만 듣지 않았을 때, 보고 있었지만 보지 않았을 때가 사실은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들리지 않은 게 아니라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관심’이 있을 게다. 관심과 애정이 있다면 굳이 노력해서 들으려 하거나 보려하지 않아도 보이고 들리고 느끼게 마련이다.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도 알고 보고 듣고 싶다면, 그 타인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갖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조영은의 <왜 나는 늘 허전한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