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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크리스텔 프티콜랭의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기성복 중에서도 맞춤복처럼 나의 몸에 꼭 맞는 옷을 만날 때가 있다. 나의 팔길이, 다리길이, 몸통의 품이 꼭 맞는 옷. 책도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야' 라고 말하게 되는 책을 가끔 만난다.


난 생각이 너무 많아요. (중략머릿속이 늘 복잡해요가끔은 생각을 멈추고 싶어요(중략내가 낄 자리는 없는 것 같아요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p9)”


욕조에 물이 가득 찼는데도 수도꼭지에서는 계속 물이 흘러나와 하염없이 넘치고 있는 그런 장면처럼, 생각이 흘러넘쳐 정신 못 차릴 때가 있는 사람. 나는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만약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까, 란 질문을 던진 적도 많았다. 저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 부르며 이러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들끓는 생각들을 품고도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저자.


저자가 말하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에 내가 100% 꼭 들어맞지는 않지만 읽는 내내 ‘맞아, 맞아’를 연발하곤 했다. 내 기억 속의 학창시절은 늘 무리와 동떨어진 채 혼합되지 못한 느낌이다. 내 마음을 완전히 이해해 주고 알아주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늘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나를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초중고 내내 반장, 부반장을 했고 대학교에서도 과대표였다. 아웃사이더라기보다는 아웃사이더를 중앙으로 끌어오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기에 타인의 눈에는 활동적이고 활발했다고 나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내 가슴 한 구석은 늘 허전했다.


예리한 감각 덕분에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모든 상황에서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많은 정보를 대개 무의식적으로 습득한다마음 아픈 일에 금세 눈물을 글썽이고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움츠러들며 불의를 보면 발끈한다이들은 주위 사람들의 말투단어를 발음하는 방식표정몸짓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중략또한 이들은 상대의 비난과 힐책조롱이나 꿍꿍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쉽게 상처받는다. (p40~41)”


위의 문장을 읽었을 때, 뭔가 누군가가 말없이 내 등을 쓰다듬어준 듯한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나 자신에 대한 불만 같은 것이 위로 받은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내 그릇이 너무 작아서 혹은 지나치게 예민해서 너무 많은 것을 담아둔다고 나를 책망하기도 했다. 다들 신경 쓰지 말라든가, 지나치게 예민해서 그런 거라는 말로 위로해주곤 했지만 작은 것에도 신경 쓰고 있는 나, 그리고 그걸 보는 나, 모두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냥 난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 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을지 모르는 위의 문장을 읽으며 오래 묵은 가슴의 짐이 내려지는 듯한 편안함이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빛으로 표현한다고 상상해 보자여러분에게는 적외선부터 자외선에 이르는 모든 파장의 빛이 있다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가시광선밖에 없다그래서 여러분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 그들은 여러분의 존재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여러분의 표현을 부분적으로 놓치거나 왜곡해서 이해한다여러분의 근사한 적외선과 멋진 자외선을 그들은 모른다여러분의 더없이 섬세하고 미묘한 표현이 그들의 눈에는 아예 안 보인다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항상 이렇게 산다.(P116)”


지나치게 눈물이 많아서 울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서조차 훌쩍이고 마는 내가 난 참 싫다. ‘싫었다’라고 과거형으로는 쓸 수 없다. 지금도 여전히 눈물이 많고 언제든 울음보가 터질 수 있으며 그것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바람을 오랫동안 품고 있지만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아의 몇 부분이 있다.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껴온 것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나의 이상론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라 도달할 수 있는, 도달하고 싶은 이상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말하면 가까운 사람들임에도 현실을 모른다고 말하거나 사회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 식의 반응이다. 그럴 때면 무언가 사람들과 벽이 느껴져 외로워진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중략견고하기가 담금질한 무쇠와 같은 가치 체계를 구축한다. (중략이 가치 체계는 절대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준을 아주 높게 둔다그들은 정의정직충직성우정사랑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며 상당히 높은 기준을 일반적이고 자명한 기준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경향이 있다그래서 이러한 가치들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다는 그들의 바람은 종종 좌절을 불러온다.(P141)”


그렇다. 저자가 말하듯, 친구라면, 사랑하는 사이라면 이러해야 한다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 결혼에 대해서도 나만의 이상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중략언젠가 반드시 연인친구이웃의 행동에 실망하게 마련이다(p154)”고 저자는 말한다. 그랬다. 나만의 기준이 너무 높은 탓일까, 기준이랄까 이상을 낮추어야만 하는가, 이 이상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등의 질문의 질문을 거듭한 적도 많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휘청할 때가 있다. 다행히 예전보다는 많이 잔잔해졌지만 가끔 파도가 치듯 감정이 일렁이곤 한다. 우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자신감을 갉아먹기도 하고 가깝게 느껴졌던 사람들과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며 평소보다 더 고독하고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무엇을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기도 하고 어둠 속에 홀로 버려진 미래를 가진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런 감정의 원인,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의 우울증을 ‘지성의 식욕부진’ 혹은 ‘지성의 영양실조’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헛돌던 방아에 좋은 곡식을 넣어주듯 지적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스스로 쓸모 있는 존재라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하나의 해결 방안이라고 말한다.


여러분에게는 슬퍼할 권리낙심할 권리남에게 폐가 될까 봐 마음 졸이지 않고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다위협을 느끼면 무서워하고 존중받지 못하면 화가 나고 이해받지 못하면 슬퍼지는 게 정상이다여러분은 차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그리고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그다음에는 거부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중략우울증은 어떤 자질이나 능력을 갖춘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자기 자신의 가치를 진심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여러분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일 필요가 없다여러분은 완벽하지 않은 그 상태 그대로 온전하다자기 자신이 되는 데 만족하라그러면 자기 정체성의 공백은 그득하게 채워지고도 남을 것이다.(P138~139)”


슬퍼해도 되고, 낙심해도 되며 남에게 폐가 될까 마음 졸이지 않고 도움을 청해도 된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이 말이, 당연하지 않으며 쉽게 행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 바로 나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읽을수록 참 세상 살기 어려운 사람이구나, 싶었다. 시시껄렁한 가십거리를 나누는 관계에서는 허무함을 느끼고 늘 진심을 담은 말을 나누고 싶다는 이상을 추구하며, 혼자 있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사람들과의 마음의 소통이 없으면 누구보다 쓸쓸해하고, 넘치는 애정과 관심을 어딘가에 쏟아야만 하는 사람. 지나치다 싶을 만큼 타인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서 오해를 사기도 하고 늘 성장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며 어제와 같은 나를 참지 못하는 참 살기 까다로운 사람이다. 저자는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이 책을 다 읽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와 그리고 자신의 멋진 두뇌와 화해한다면 나는 목적을 다 이루는 셈이다.(p17)”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의 뇌와 화해시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생각이 많다는 것, 이해받지 못한다는 감정, 마음이 통하는 사람에 대한 이상. 그런 세포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는 걸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이 바꾸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한다는 의미다. 다른 사람들과 어딘가 다르고 그들과 융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나. 어딘가 내가 잘못된 것인가, 내가 틀린 것인가란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라는 말처럼 들려 안심이 된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 대한 책을 읽고, 생각이 많은 나를 떠올리며 서평을 쓰다가, 서평 쓰는 도중에 생각에 빠져 일기를 끼적이다 다시 서평으로 돌아왔다. 서평을 마무리 지을 수 있어 다행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 괴로울 때도 많았지만 요즘은 아무 생각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살았을 때, 그 순간 소름이 돋는다. 기억상실증에 걸린듯 생각이란 걸 놓은 그 시간만큼 시간을 잃어버린 것 같아 불안해질 때도 생겼다. 이런 느낌은, 학창시절보다는 나의 뇌와 노는 법을 배웠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일까, 라고 문득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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