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Sep 03. 2021

읽지 못하는 책

# 나는 고집이 세다.

나름 나이를 먹으며 사회적인 얼굴도 ‘배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럼에도 아닌 걸 아니라고 말까지는 안 할망정 긍정하는 듯한 거짓 표정도 잘 안 된다. 책에 대해서도 그렇다. 누가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도 책을 읽을 때 반감이 생기면 마음속으로 걸리는 문장마다 일일이 대응을 한다. 만약 서평을 꼭 써야 하는 책이라면 좋은 척, 괜찮은 척 그냥 써도 누구도 뭐라 할 사람도 없건만 거짓으로 쓰기 싫다는 고집을 부린다.      


물론 단순히 취향의 문제라면 나와 맞지 않는다고 틀린 건 아니니까 결국에는 타협을 한다. 하지만 가격만큼의 가치가 있는 책인가, 나의 귀한 시간을 투자할 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책인가라며 엄격하게 따지고 든다. 하지만 고집은 센 반면 소심해서 결국 생각한 모든 걸 다 쓰지도 못하면서. 서평도 못 쓴 채 뾰로통한 얼굴로 심술만 부리는 어린아이가 된다.      


마치 어릴 적 미술학원에서 공항을 그리라는 선생님 지시에 몇 시간을 빈 스케치북 앞에서 울먹이며 앉아있던 그때와 같다. 공항을 가본 적 없었기에 그릴 수 없었으면서도 못 그리겠다는 말도 하기 싫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릴 수 없는 주제가 있다는 게 억울했던 것인지, 그때의 내 감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몇 시간 그렇게 스케치북만 노려보던 때가 생각난다.     


# 난 사실 그렇게 가지고 싶은 게 없다.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것도 딱히 없다. 분명 나보다 외모나 재능, 재력 등에서 월등히 차이가 나는 걸 알면서도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 자신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인다는 생각은 물론 한다. 나도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거의 없지만 뺏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기억으론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탐나고 질투심에 불타는 게 있다. 글이다. 매력적으로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질투가 난다. 샘이 난다. 분명 그들도 쉽게 얻은 재능은 아닌 걸 알면서도, 그만큼 내가 노력한 것도 아니니 질투할 처지가 아닌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부럽고 질투가 난다.  

   

글에 대한 나의 이런 욕심 탓일까.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은 ‘읽히지’ 않는다. 그냥 읽으면 되잖아! 라고 나도 수없이 나에게 말해 보았다. 그러나 읽히지 않는다. 마치 목구멍에서 음식이 넘어가지 않고 정체된 듯한 느낌이다. 내용이 어려워서 못 읽는 경우도 있지만 이와는 다르다. 문장에 일일이 대응하면서 문장과 싸우다 보니 그 다음을 읽지 못하게 된다. 참 못난 모습이다. 나도 안다. 내가 글을 읽는 수준이 굉장히 높아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쯤은. 초등학생이 대학원생 논문을 꼬투리 잡는 듯한 느낌일 게다. 왜 그런 걸까. 왜 이 글에 대해서는 이렇게 유난스럽게 구는 것일까. 왜 이렇게 비판적이 되는 것일까.왜 이렇게 글에 대해서는 까탈스럽고 모난 사람처럼 구는 것일까.     


# 질문을 던지고 계속 그 질문을 바라본다. 

왜 일까. 도대체 왜 일까. 생각해보면, 내가 유난스럽게 비난을 하는 사람, 행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내가 들어 있다. 내 안에 숨겨둔 모습이 타인을 통해 드러났을 때 나는 유난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다. 나와 전혀 다른 특성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신기해 하거나 호기심도 보인다. 하지만 내 안에 꽁꽁 숨겨둔 나조차도 싫어하는 특성을 마주쳤을 때는 나도 모르게 더 심하게 반응한다. 나와 닮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꽉 쥐었던 두 손의 힘이 조금 풀린다. 이제 조금 마음도 가라앉는다. 글의 문제가 아니었다. 외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었다.     


# 이십 대 때 상상한 사십 대는 어른이었다.

하지만 사십 대가 된 지금의 나는 내가 ‘어른’이라는 생각을 못한다. 아직도 지혜롭지 못할 때도 많고 관대하지 못하게 굴 때도 많다. 육십 대, 칠십 대의 나를 상상해 본다.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파도치는 감정의 너울에 멀미를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그때는 그 파도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을까. 혹은 더 이상 파도조차 치지 않는 재미없는 내가 되어 있을까. 

    

사실 내가 원하는 육십 대,칠십 대의 나의 모습은 정해져 있다. 감정의 파도는 치되 그 파도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모습이다. 이 감정의 파도는 아마 내가 평생 짊어져야 할, 혹은 짊어지고 싶은 삶의 짐일 게다. 그렇다면 나는 '나라는 소설'의 삼십 년 분량의 이야기를 어떻게 채워야 할까. 그것이 나의 삶의 과제가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그렇게 예민하게 굴면 살기 힘들 텐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