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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14. 2021

김이섭의 <인생의 답은 내 안에 있다>

장, 절별로 내용은 독립적이고 그 길이도 2장 내외인 책. 이런 책의 서평은 쓰기가 어렵다. 서평이라고 하면 한 권의 내용을 아우르는 큰 줄거리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묶기가 쉽지 않아서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분명 읽기 쉽다. 이해하기도 쉽다. 한 번에 쭉 읽지 않아도 되어서 짬이 날 때마다 읽어도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다. 마음에 담고 싶은 부분에서 멈추어 서서 한참을 생각해도 괜찮다. 급히 가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이 그렇다. 각 내용의 길이는 짧지만 멈추어 서게 만든다. 가볍기 때문에 짧은 것이 아니다. 잔소리가 길다고 더 마음에 와닿는 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짧고 강하기 때문에 더 깊게 다가올 때도 있다.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하인리히 뵐은 우리는 사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라고 말했다.(p37)”     


처음 주운 글이다. 책 속에서 나는 글을 줍는다. 줍고 들여다보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막막할 때 내가 찾는 곳은 책이다.      


인생의 문제는 문제지에 쓰여 있는 게 아니다.(p40)”     


나는 시험이 싫다. 내 앎을 누군가가 정한 기준으로 판단 ‘당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엇을 물어도 다 답할 수 있어야 잘 안다는 것이므로 부당하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연히 아는 문제가 나왔다면 그 우연 또한 실력인가, 라는 반감이 있다. 시험이 주는 부담감에 부리는 억지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낸 문제를 푸는 데에는 거부감이 있다. 인생 또한 그렇다. 그래서 어렵다. 문제를 내기 위해서는 문제를 낼 만큼의 앎이 필요하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좋은 문제를 낼 수 있다. 좋은 답 이전에 좋은 문제를 내고 싶다.     


맹신은 모든 걸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불신은 스프링처럼 튕겨낸다지금 우리에게는 필터가 필요하다이물질과 불순물을 걸러내고 온전한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여야 한다.(p50)”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지금처럼 온전한 정보와 지식이 무엇인지 고민스럽고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수많은 기사나 정보, 개인들의 경험과 지식. 그중에는 사실도 있고 일부만 사실인 경우도 있고 아님 말고 식의 잘못된 정보도 섞여 있다. 그러한 혼돈 속에서 진실을 구분해야 한다. 제대로 된 진실을 알아보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러시안룰렛 게임처럼, 혹은 오징어 게임처럼 나와 내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한 이 게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맹신인가 불신인가. 솔직히 모르겠다. 그렇다고 선택이나 생각 자체를 피할 수도 없다. 해결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바로 서야 바로 볼 수 있다.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 소외된다.(p68)”     


인생의 책 중 한 권인 에리히 프롬의 <소유나 존재냐>에 나오는 한 문장을 만났다. 소유하고자 하면 사랑도 삶도 지식도 본질이 왜곡된다. 마음이 텅 비고 허무해지고 힘을 잃었을 때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어진다. 불필요한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면 이 문장을 떠올린다. ‘마음이 외로운 거구나’라며 나의 마음을 토닥여 준다.      


시계추는 방향성과 목적성을 갖는다시계추는 흔들리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시간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는 건 시계추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 시계추는 일상의 미학이고 반복의 미학이고 ‘1초의 미학이다.(p72)”     


사실 이 문장은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 그저 ‘흔들리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라는 이 말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흔들리는 게 아니다. 이 말이 나에겐 필요한 모양이다. 이유 없이 마음에 남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염없이 들여다보게 되는 문장이 있다.      


공존은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p95)”     


이 문장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결혼’ 덕분이 아닐까 싶다. 사회생활에서의 다름은 불편함일 뿐이었다. 극단적으로는 그 집단을 떠나게 되면 해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가족과의 다름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생의 짐이라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한다는 체념에 가깝다. 하지만 결혼을 통해 알게 된 다름은 그것들과는 달랐다. 피하려면 피할 수는 있겠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평생의 짐처럼 여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결혼을 통해 만난 다름이었다. 아직도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만은 안다. 다름을 틀림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상대의 지금까지의 삶과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방정식은 어떤 문자가 특정한 값을 가질 때만 성립한다반면에 항등식은 식에 포함된 문자에 어떤 값을 넣어도 늘 성립하는 등식이다그러니 사랑은 방정식이 아니라 항등식이어야 한다.(p140)”     


남녀 간의 사랑뿐 아니라 모든 사랑은 항등식이어야 할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랑이 상대에게도 사랑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상대가 원하는 사랑과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서로 같은 모양인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사랑을 전달해야 하고 내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상대에게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사랑은 방정식이 아닌 항등식이니까.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큰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 우리말에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속담이 있다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존재하는 모든 건 쓸모가 있다단지 쓸모를 모르고 쓸 줄을 모르는 것뿐이다그러니 쓸모없음을 탓할 게 아니라 쓸모를 모르는 나 자신을 탓해야 하지 않을까.(p158)”     


책을 읽고 나면 마음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서평을 쓰고 책 속의 좋은 구절들을 워드로 남긴다. 그중에서도 몸에 새기고 싶은 문장이 있다면 수첩에 손으로 적어둔다. 無用之用이라는 단어는 수첩으로 온 문장이다.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나의 시력이 좋지 못해서 그렇다는 걸 잊지 않고 싶다.      


가을이 되면 낙엽을 줍는다. 한 장이나 두 장이라도 매해 꼭 줍는다. 누군가에게는 길거리를 더럽히는 쓰레기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 해, 그곳,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이 된다. 주운 낙엽과 색칠한 하트 모양 골판지를 모아 한 장의 그림(대신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으로 만들어 냉장고 문에 붙어 두었다. 이 그림은 나에게 無用之用을 되새기게 한다.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이 지닌 치유의 힘을 믿는다그리고 성찰하는 힘나를 설명하는 힘소통하는 힘을 키우는 인문학이다.(p222)”     


처음 이 서평을 시작할 때는 알지 못했던 한 가지를 찾았다. 이 책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단어, 그건 ‘희망의 인문학’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단어가 아닐까.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세상,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아니라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더 소중한 세상, 냉혹한 삶의 현장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함께 부대끼며 행복을 재발견할 수 있는 세상, 그러한 세상을 인문학을 통해 만들어보자고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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