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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24. 2021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참 오래전에 읽은 책이다.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서평을 쓰고 싶은 책 제목을 가진 한글 파일이 나열되어 있다. 이 책도 그러했다. 컴퓨터를 켤 때마다 감히 서평을 쓸 수 없어 다른 곳으로 시선 돌리기를 반복했다.     


이어령 선생님과 인터뷰를 담은 김지수 작가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열림원, 2021)을 유튜브의 책 낭독을 통해 들었다. 책 속의 일부분이었지만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말을 들은 아이처럼 한동안 멍해졌다. 이어령 선생님의 성함은 알고 있었지만 사실 지금까지 그분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지나치게 편협한 독서를 하는 편이라 취향이 아니면 읽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 나에게 우연히 ‘들은’ 그분의 책 속 구절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동을 주었고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포기했던 이 책의 서평을 쓸 수 있게 만든 이어령 선생님의 책 속 구절은 이것이다. 수많은 책을 내신 그 선생님조차 작가는 매번 글을 실패하기 때문에 다시 글을 쓰는 것이라고 하신다. 최고로 만족한다면 다시 글을 쓰지 않겠지만 매번 실패하기 때문에 다시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분의 그 표현을 듣고, 내가 쓰지 못했던 서평들이 떠올랐다. 욕심과 두려움이었다.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쓸 수 없게 만든 것이고, 잘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고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법한 이 말을 아이가 처음으로 말을 배운 그날인 듯 알게 되니 용기가 난다. 그리고 실패하기 위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제목의 한글 파일을 열었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내가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그녀의 글이 바로 이 책의 제목과 같기 때문이다. 평론가로서 신형철 작가가 하나의 커다란 안경을 주었다면 그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바로 김애란 작가의 글이다. 내가 애정하는 두 작가가 이렇게 연결이 된다.      


아내가 수술을 받은 날 우리는 병실에서 껴안고 울었는데 울면서도 나는 아내와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았고 그 슬픔으로부터도 아내보다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는 무참해져서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 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타인의 슬픔에 대해 공부‘해야만’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사랑에서일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아픔이고, 그 아픔은 심지어 부부의 아픔(아마도)이었을텐데도 ‘타인의 아픔’이 된다는 한계를 느끼며 문학하는 사람으로 ‘슬픔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서평(내 글)보다 인용(저자의 글)이 더 많은 것이 과연 좋은 글인가, 라고 한다면 도저히 거짓말로도 ‘맞다’고 우길 수는 없지만 이 서평을 그래야만 한다. 저자의 글은 하나의 조사나 한 문단만 빼도 문장이 성립이 되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이루어져 있다. 내 글이 낄 틈이 도저히 없다. 내 글이 그의 글을 손상시킨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므로 서평으로서는 좋지 않을망정 이렇게 그의 글을 가능한 한 많이 인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만약 누군가 나에게 신형철 작가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를 ‘정확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정확한 사랑만이 사랑 받고 있음을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2014)에서 말한다. 그리고 또 다시 이 책에서 그는 타인의 슬픔에 대해 위로하기 위해서는 ‘정확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진정한 위로가 된다고.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애당초 성립이 되지 않는다. 완전히 동일한 경험과 동일한 고통을 가진 인간은 세상에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도 사실 미지수다. 그러므로 정확한 위로, 정확히 같은 슬픔 공유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슬픔을 배워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성립된다. 안다는 확신이 아니라, ‘배워야 한다’는 자세를 취할 때 조금이라도 타인의 슬픔에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왜 타인의 슬픔에 대해 배워야만 하는가, 타인의 슬픔이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고통이란 무엇인가, 규정되지 못한 진실에 대해 아파하는 사람들의 억울함은 어떤 모양인가, 삶이 진실에 베이는 순간은 언제인가. 슬픔에 대해 배우려 하지 않거나 불편하니까 회피하게 되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누구나 제 몫의 결여를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런 인간이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한다고 드러내놓고 말하는 몇 안 되는 작가의 글이기에 더더욱 욕심이 생겨서 서평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쓰고 싶다는 마음 이전에, 이 책을 한 장의 서평으로 쓰려고 했던 것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었다. 불가능한 욕심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서평 쓰기가 훨씬 편해진다. 좋은 책은 사람의 삶과 마찬가지로 한 마디로, 쉽게, 단순하게, 정의 내리고 정리할 수는 없다. 읽고 또 읽고 그러다 시간이 흘러 삶의 어느 순간에 다시 그 책을 떠올리기도 하고,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 후에야 그 책에서 말한 한 문장의 의미를 자신만의 언어로 드디어,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기적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는 법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살기 위해 사랑한다’가 맞다. 살고 싶어서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고 살고 싶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사랑한다는 표현도 가능하다. 내 안의 마음이 이 책을 통해 언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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