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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Dec 17. 2021

행복에 대하여

내가 행복한 이유


책 읽어주는 유튜브로 낭독을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혹은 불행하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그때가 어쩌면 진정으로 행복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것.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행복한가?'라고 묻는다면 그제서야 나는 알게 된다.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본 적이 없네? 난 어떻지? 행복한가?'라고 그때 비로소 행복과 불행을 따져보겠지만 내 안에는 행복이나 불행이란 구분 자체가 없다. 구분 자체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행복이라는 빛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행이란 그림자도 함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요근래 행복이란 단어도 불행이란 단어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물론 내 삶에 그런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파랑새를 찾아헤매듯 목말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러다 책 낭독을 통해 문득 나에게 행복이란 질문을 던졌고 결론은 행복한 이유들만 나열되었다. 그런데 왜 나는 행복이란 단어를 잊고 있었는가. 그 질문의 결과 나온 답이 이것인 것이다. '행복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불행이란 그림자가 함께 있을 때'라는 것. 굳이 난 행복해, 라는 말을 입으로 내뱉을 필요가 없을 때, 그때가 어쩌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다.


불행도 그렇다. 행복을 꿈꾸지 않는다면 불행하단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꿈꾸는 어떠한 이상적인 모습이든 상태든 무언가가 있고 그곳에 있을 때, 그것을 가졌을 때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멀리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인 세상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며 그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인 세상에 있을 때 비로소 나는 '행복한 것'이 된다. 반대로 그곳에 없는 나는 '행복하지 않은 상태' 즉 불행이 된다.


행복하진 않지만 불행하지 않아, 라는 말은 어쩌면 타협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든다. 행복이나 불행이란 잣대가 이미 자신 안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행복하진 않지만 만족해, 라는 말도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나는 불행하지 않아, 라고 어필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행복하다는 거짓말은 차마 못하겠지만 적어도 불행한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아? 라고.


아버지도 이젠 노인이란 생각이 들었어, 라는 언니와의 말에 눈물이 나고 목이 메였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고르기도 했다. 마흔이 되고 새치가 아닌 흰머리가 늘어나고 챙겨 먹어야 할 약도 생겼다. 코로나로 혹은 이런 저런 이유로 소원해지며 그나마 몇 되지 않는 관계들의 끈이 희미해지고 있다. 코로나로 활동 자체도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 하루도 소리 내어 깔깔 웃고 빙그레 웃는 시간들이 있었고 각 음식의 맛을 음미하며 식사를 했다. 물질적으로 늘어난 것은 없지만 행복과 불행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하루를 보냈다. 이런 일상들이 어쩌면 진정 행복이란 사실을 깨닫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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