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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Mar 18. 2022

김지수, 이어령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마음이란 참 이상해서 내 것임에도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마치 저울 위에 올려진 것처럼 상대 물질이 무엇인가에 따라 변화한다. 그래서 어떤 날은 저 멀리를 보는 것이 힘겹지만 어떤 날은 눈앞의 일들이 힘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눈앞의 일들이 숨 막히게 느껴질 때, 조금은 너그럽게 인생을 바라보고 싶을 때, 나보다 먼저 인생길을 걸어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펼친다.    

 

스승이 필요한 당신에게     


인간이 아니라 시간이 주인공인 세계에서 속절없이 미끄러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나는 막막했다그리고 그리웠다울고 있는 내게 왜 그리 슬피우느냐?’고 진지하게 물어주는 이가그런 스승이.(p5)”  

  

스승이란 어떤 사람일까. 아니, 지금 당신에게는 ‘어떤’ 스승이 필요한 것일까. 학업이나 전문 지식과 관련된 스승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에 있어 나를 다독여줄 스승일 수도 있으며, 정신적 성장을 위한 스승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인생의 스승일 수도 있다. 이어령 선생님과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이 책의 핵심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p17)”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다.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     


몇 번의 자살 시도와 오랜 정신과 치료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친구는 언제나 생에의 집착을 보였다. 젊은 나이에 몸은 이미 노인의 육체가 되었고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늘어난 상태에서 말이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더 하지 않을까 했는데 친구는 그 누구보다 삶의 욕망을 보였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친구에 비하면 행복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오히려 죽음을 더 가까이에 그렸으니까. 이런 나에게 이어령 선생은 말한다.   

   

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네눈동자의 빛이 꺼지고입이 벌어지고썩고시체 냄새가 나고.... 그게 죽음이야옛날엔 묘지도 집 가까이 있었어귀신이 어슬렁거렸지역설적으로 죽음이 우리 일상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었던 거야신기하지 않나죽음의 흔적을 없애면 생명의 감각도 희미해져.(p69)”     


살고 싶다는 욕망, 삶에의 집착, 이건 죽음을 아는 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검은색이 검은색이기 위해서는 흰색이 있어야 하고 빛이 빛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존재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어령 선생은 죽음을 이렇게 비유한다. ‘주머니 속에 덮여 있던 유리그릇’과 같다고. 나를 비롯한 전쟁을 겪지 않은 요즘 세대들에게 죽음은 멀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알 수 없는 질병이 퍼졌고 마스크 한 장에 목숨을 걸며 몇 시간 줄을 서기도 했다. 코로나를 통해 우리는 잊고 있던 주머니 속 유리그릇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주머니에 유리그릇 넣고 다녀봐깨질 것 같아서 불안하지그게 죽음이라네.(p70)”     


이 말의 의미는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 반대로 삶의 소중함,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가치를 알게 하는 것이 죽음의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나니 가장 아쉬운 게 뭔 줄 아나? ‘살아 있을 때 그 말을 해줄걸이야그때 미안하다고 할걸그때 고맙다고 할걸.. 지금도 보면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죽음이나 슬픔이 아니라네그때 그 말을 못 한 거야.(p284)”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이 세상에 없다. 표현할 수 없는 일을 겪은 이어령 선생은 우리에게 위와 같이 말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같은 별 것 아닌 말을 하는 것, 언제든 할 수 있지만 부끄러워서, 귀찮아서, 혹은 이해해주지 못해서 하지 못했던 그 말 한마디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고.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매사 불안해하며 겁을 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죽음이 생각만큼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인식은 오늘, 이 순간,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내가 지금 가진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며 이 깨달음은 곧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은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매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p166)”     


나는 참으로 내 인생을 살고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삶이 살아 있는 삶일까. 이 질문에 이어령 선생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 속의 세상이야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p106)”


비유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쉽게 이해되는 문장이다. 우리의 몸이 중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 또한 항상 억압과 관습의 압력을 받고 있다. 이 압력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그 중력을 거슬러야 한다. 남의 생각인지도 모른 채 물의 흐름을 그저 쫓기만 하는 삶은 결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면 겁날 게 없다(p34)”     


대학원 시절 논문을 쓸 때도 그랬다. 선행논문들을 짜깁기하는 글을 쓸 때는 연결고리 하나만으로도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내 안에서 나온 생각, 의견일 때는 그 생각이 지나치게 길거나 정돈이 되지 않아서 힘들 뿐이었다. 주장과 하고 싶은 말은 내 머릿속에 있었기에 누군가의 지적을 들어도 논문의 문제점과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서평도 그렇다. 저자의 견해를 정리하기만 하는 서평, 즉 내 생각이 들어 있지 않을 글은 쓰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편하다. 비판도 없고 긍정도 부정도 없으며 기계적으로 정리만 할 뿐이다. 다만 이 글은 옳은 글인가, 내가 쓴 그 글자들의 무게는 정말로 합당한가, 라고 묻는다면 자신이 없어진다. 내가 썼지만 내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간곡히 당부하네만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p38)”  

   

어릴 때부터 느낌표와 물음표 사이를 오가는 삶을 산 덕분에, 외로웠다는 이어령 선생. 학교에서 손 들고 질문하는 학생을 곱게 보지 않는 시선은 물론, 누군가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구하는 것 자체가 반대라고 보는 이 사회에서 물음표를 안고 사는 이어령 선생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위와 같이 간곡히 부탁한다.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라고.’ 몇 번이고 곱씹고 싶은, 내 몸에 새기고 싶은 말이다.     


뉴스 하나를 보든 책 한 권을 읽든 어른의 말을 듣든 이해가 되지 않으며 ‘예’라고 하지 못하는 나는 이어령 선생의 ‘평생 외로웠다’는 말이 참 아리게 다가온다. 조금 부당해도, 조금 이상해도, 조금 납득이 가지 않아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아는 척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세상 사람들의 말이 나는 불편하다. 이런 나이기에 위의 문장이 더 힘이 된다.      


왜 흔들리겠나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나무들이 흔들리는 것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네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직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파동을 만들지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p292)”  

   

살아있다는 느낌을 찾아헤매곤 했다. 굳이 문제를 만들지 않고 유하게 사는 삶을 동경하면서도 일상이 반복되면 그 안정이 오히려 불안해지기도 했다. 이런 나에게 이어령 선생은 위와 같이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남 쫓아가는 욕망은 물독도 두레박도 아니고 돌멩이라네아름답다는 것살아 있다는 것그 갈증을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지 못하면 돌멩이처럼 되는 거야.(p188)”     


인간은 지우개 달린 연필이다     


이어령 선생의 지식의 깊이와 넓이만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많은 책이다. 그분과 인터뷰하는 저자의 글 또한 그 깊이가 깊어서 한 페이지는 물론 한 행도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읽고 다시 읽고를 거듭하며 당장은 소화되지 않는 글들을 워드로 정리해 두기도 했다. 그중에서 내 안에 크게 자리 잡은 표현 중 하나가 이것이다. ‘인간은 지우개 달린 연필’이라는 것.     


인간은 어쩌면 지우개 달린 연필이야. (...) 연필은 기억하고 남기기 위해 있고지우개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있잖아. (...) 그런데 지우는 기능과 쓰는 기능을 한 몸뚱이에 달아놓은 그게 우리 인생이잖아비참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고 망각과 추억이 함께 있으니 말일세.(p201)”   

  

당연한 말임에도 이 말을 나는 인정하지 않은 채 살아왔던 걸 이제야 깨닫는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가족, 친구처럼 소중한 어떤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장점, 좋은 점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단점, 못난 점, 상처, 아픔까지도 함께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항상 지나치게 완벽함을 추구했다. 나 자신에게도 그랬다. 그래서 언제나 밝은 면, 옳은 면만을 취하고자 했고 그렇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거부하고 꺼려했다. 그게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빛을 가지려면 그림자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어령 선생은 나에게 말한다.   

  

이는 삶이 삶으로서 가치 있기 위해서는 죽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회적인 문제, 범죄들 또한 인류의 삶에서 완벽하게 배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 또한 포용해야 한다고 이어령 선생은 말한다. 완벽한 지도자는 세상에 없다. 완벽한 인간도 없으며 완벽한 시스템 또한 없다. 당연한 이 말들이 오랫동안 나를 맴돈다.     

 

스승은 없다    

 

스승이 필요한 당신에게 건네는 초대장과 같은 이 책. 그러나 정작 이어령 선생은 단호하게 말한다. 스승은 없다고.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어인간이 그런 존재야거기로부터 시작해야 하네그게 실존이야. ‘나는 혼자다라는 걸 모르는 사람과는 얘기가 통하지 않아.(p233)”   

  

궁극적으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네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고스스로 알고 깨닫는 자홀로 자족할 수밖에 없는자... 그래서 군자는 필연적으로 외롭지.(p234)”     


이어령 선생이 하고자 했던 말은 스스로 생각하고 깨닫고 변화하지 않는 한 나 자신은 물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좋은 강의를 들어도 알게 된 것, 배우게 된 것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타인의 생각이며 타인의 뒤통수를 좇는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삶,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그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고 외롭고 멀게 느껴지겠지만 말이다. 이런 삶을 위해 이어령 선생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글 쓰는 사람으로 남으셨으며 그분의 글(생각)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스승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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