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공자의 말씀(p313)”이라고 말하는 저자. 논어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려울 것 같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나에게로 이 책이 찾아왔다. 논어에 대해 해박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는 어떤 이의 글보다, 인생의 버팀목이 공자의 글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마음이 나를 더 움직인다.
2천여 년 전의 중국의 한 사상가의 글이 오늘날에도 읽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공자의 사상은 인간 세상의 여러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문장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 가정
“세상의 모든 일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에 모든 일의 원인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가족들과 관계가 좋지 못하다면 이를 자신의 가장 시급한 수련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p36)”
공자는 예(礼)를 중시했던 만큼 그와 관련된 글이 많다. 부모와 자식, 군자와 신하, 스승과 제자 등의 관계는 물론 사람과 사람 간의 예의에 대한 문장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관계의 기본은 가정이라고 공자는 말한다.
어릴 때는 우리집만 복잡하고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빈부를 떠나 각 가정에는 각 가정마다의 불행이 존재하고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서로 다른 크기로 존재함을 알게 된다. 완벽한 부모도, 완벽한 자식도, 완벽한 가족도 없다. 주어진 환경은 자신이 바꿀 수 없지만 그 환경을 뛰어넘어 미래의 삶은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다. 이를 모른 채 환경에 굴복하며 원망하며 비난하는가, 아니면 그 환경을 뛰어넘는가, 그것이 중요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항상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가게 된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친밀한 스승이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들에게 한 말들, 가령 남을 속이지 말고, 배움에 충실하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을 자신 또한 지키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p50)”
자녀의 입장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될 수 있는 어른이 된 지금은 위의 문장이 더 깊게 다가온다. 아이의 가장 첫 번째 스승, 본받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부모일 것이다. 제일 처음 만나는 인간이 부모이며 관계가 가정이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미래의 우리 아이에게 ‘스승’이라 불릴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을까.
“효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저 미루어 짐작해 보양식을 해드리고, 고운 옷을 지어드리며, 걱정할 일을 알려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생각을 읽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공경하는 것이 진정한 효라 할 수 있다.(p151)”
살가운 애정 표현을 주고받은 적 없는 가족 분위기 속에서 자란 탓인지 효도라는 단어도 왠지 낯간지럽게 느껴진다. 아빠에게 고맙다, 죄송하다는 말도 어른이 돼서야 간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효도가 무엇인지 알고 진정한 효도를 실천하고 싶단 생각을 한다.
“선행과 효도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는 그 마음을 보아야 한다. 반면 선행과 악행의 판단 기준은 반대이다. 만약 악행을 저지를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로 나쁜 사람으로 단정해 버린다면 세상에 과연 선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p71)”
부모에게, 자식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가, 라는 금액의 많고 적음으로 효를 판단하거나,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결코 효도, 사랑도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당연한 이 말을 우리가 쉽게 잊고 있기에 그래서 공자는 위와 같이 말한 것이 아닐까 싶다.
# 배움
정확하진 않지만 내가 처음으로 만난 공자의 가르침은 ‘배움’이었다. 공자의 학문관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그의 마음가짐을 본받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게 바로 이것이다.
“공부의 목적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됨을 배우는 것이다.(p70)”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리 학식이 높고 지위가 높을지라도 사람됨이 부족하다면 그 사람은 배움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지식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배움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 왜 배워야 하는가, 이 배움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가. 이 질문들은 최종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나의 배움의 목표다. 그런 나이기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영어 단어나 사자성어, 속담, 사회용어를 모른다고 비웃고 놀리며 웃음거리로 만드는 장면은 불편함을 감출 수 없다. 학력이 높다고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것 또한 편견이란 생각이 든다.
“학문의 성과는 책 속에 담긴 지혜를 파악하고 깊이 체득해 삶을 바꿀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p75)”
공부의 목적이 단순히 더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라는 좁은 의미로 변질되어 버린 요즘. 돈만 잘 벌 수 있다면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논리다. 배움의 목적은 분명 그게 아닐 것이다.
“공자가 말하길 ‘제자는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와서는 공손하며, 행동을 조심하고 믿음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사귀어야 한다. 이와 같은 걸 실천하고도 힘이 남는다면, 그 힘으로 문을 배워야 한다.’(p61)”
여기서 제자란, 젊은 청년이나, 어린아이, 또는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사람으로 해석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모든 배움의 기본은 사람됨이라고 공자는 말한다. 사람됨이 갖추어지지 않은 채 지식만 가득 찬 이기적인 사람이 그 지식으로 높은 지위와 권력을 얻게 되면, 그가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면 과연 그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를 망가뜨리는 건 무지가 아니라 자만’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고, 자신이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있으며,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 모든 지식을 겸허히, 그리고 신중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성장할 기회가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득의양양하는 것이다.(p196~197)”
모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이미 흔한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문장을 읽을 때마다 매번 여러 번 곱씹게 되고 내 안에 새기게 된다.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자만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름을 찾지 못했을 때가 가장 두렵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공부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모르는 걸 찾아내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깨닫는 것이 공부라고 말하고 싶다.
# 내 안의 소인과 군자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소인과 군자,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수련과 고찰을 통해 소인의 모습을 줄이고, 군자다운 면모를 키워나가려 노력해야 한다.(p179)”
사실 이 문장은 나에게 큰 위안을 준다. 소인과 군자는 처음부터 나누어져 있고 소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나는 군자가 아니기에 필시 소인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안에는 소인과 군자가 공존하는 것이라면 군자의 부분이 더 커지도록 노력하면 된다는 뜻이 된다. 다행이다, 노력해도 된다는 사실이.
군자가 되고 싶은 이유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는 아니다. 나를 위해서다. 내가 소인의 마음을 가질 때는 나 스스로가 너무 괴롭다. 타인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섭섭해하는 내 자신을 내가 견디기 힘들다.
“공자, 맹자, 왕양명 모두, 사람은 누구나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이 끊임없이 수행하는 이유는 뭘까? 수행의 목적은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꾸준히 향상시키기 위함이다. 공자는 언제 어디서든지 기쁠 수 있었고, 긍정적인 태도로 세상의 변화를 바라볼 수 있었다. 공자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강한 사람이었다.(p310)”
나 또한 그렇다.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배우고 싶고 깨닫고 싶고 변하고 싶기에 책을 읽는다. 책이 모든 진리는 아니지만 나의 모름을 깨닫게 해 주고 시도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알려주고 나의 잘못됨이 무엇인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내 마음이 불안할 때, 이 불안의 근원은 욕심일 수도 있고 삶의 태만이 그 원인일 수도 있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그래서 내가 편해지고 행복해지며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또한 함께 행복해지길 바라며 죽는 순간까지 배우고 싶다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