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모든 책들이 대출 중이거나 예약이 3, 4명씩 늘어서 있던 책.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저자 중 한 명인 권일용 프로파일러는 워낙 유명한 분이기에 이 책이 인기가 있는 건 당연하다. 더구나 드라마화되면서 더더욱 유명세를 탄 것도 있을 게다.
“이 실화는, 이 돈키호테들이 어떻게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링팀을 만들고 그들이 범죄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p19)”
이 책을 간단히 소개하면 위의 문장이 아닐까. 내가 그렇게나 읽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프로파일러의 시작을 알고 싶었던 걸까. 물론 그건 아니다. 평소 형사물 드라마나 영화, 추리물에 관심이 많은데 그건 범죄 자체를 알고 싶다기보다는 범죄를 풀어나가고 해결해 가는 과정, 그 속에 나타난 인간의 심리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이 심리가 범죄자보다는 범인을 추리해가는 해결자의 입장에서 그려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프로파일러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범인을 찾아가는 해결자가 아닌, 범죄자의 심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왜 똑같은 환경에서 누군가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한 괴물이 되고, 누군가는 정상인으로 남는가.(p50)”
“네 살 여자아이를 강간하고 죽인 뒤 토막 내는 행위는, 소매치기나 식빵을 훔친 장발장의 범죄와는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한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이토록 완벽하게 상실할 수 있는가.(p53)”
권일용 프로파일러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계속해서 품었던 의문이 위의 문장이다. 책의 곳곳에서 나온다. 잔인하다는 단어가 초라해 보일 만큼 이해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냉혈한을 향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을 동정하고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똑같은 범죄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범죄의 이유를 찾아내려 한다. 하지만, 가난했고 학대받았고 불행했다고 모두가 그렇게 괴물이 되지는 않는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는가, 라고 프로파일러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질문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왜 농경 사회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던 냉혈한이 2006년에 태어났는가. 냉혈한이 또 만들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냉혈한이 될 사람을 미리 알아차릴 방법이 있는가. 붙잡힌 냉혈한은 교정 가능한가.(p153~p154)”
뉴스에서 가끔 보는 알 수 없는 범죄를 보며 나 또한 ‘왜?’란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살인까지는 아닐지라도 지나가는 사람을 폭행하거나 지하철이나 가게 안에서 이유 없이 행패를 부리거나 하는 사건들이 종종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왜?’를 던질 것이다. 왜에 합당한 이유를 듣고 ‘아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안심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러한 이유가 없었다면 이러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납득하고 싶어서다. 이유는 적혀있지 않는 기사도 가끔 있는데 우리에겐 이유가 필요하다. 왜, 그렇게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질렀는지, 어릴 적 상처인지, 술이나 약 때문인지, 피해자가 어떤 불쾌감을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들도 많다.
이유가 있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도 그렇다. 이유가 있어서 상대는 나에게 그렇게 쌀쌀맞은 태도를 취했던 것이고 나 자신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상대에게 그렇게 화를 냈던 것이다, 라는 식의 이유가. 하지만 나를 돌아보면 스스로도 이유를 명확히 찾기 어려울 때가 있다. 굳이 쥐어짜내듯 찾아낼 수 있는 이유는 있지만 충분하지 못할 때도 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해결할 수는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그냥 회피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란 게 어려운 게 아닐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는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악마와의 계약으로 마음을 빼앗겼던 하울이 마음을 되찾게 되는데, 하울은 마음이 ‘무겁다’는 표현을 한다. 그렇다. 마음은 무겁다.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마음은 복잡하고 무겁고 섬세하고 예민하고 그래서 어렵다. 마음이 없을 때 차라리 삶은 더 편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에도 프로파일러들은 개인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열심히 일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질문의 답은 다음에 문장에 들어 있지 않을까.
“범죄로 인한 고통의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p276)”
그렇다. 되풀이되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두 사람이나 한두 조직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든다. 가정에서는 가정의 역할이, 학교에서는 학교의 역할이 있을 것이고 사법부, 언론, 정치 등 각 조직이나 집단에서도 각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저 누구를 칼로 찌르거나 때리는 것만이 범죄가 아니고, 부당하게 일을 처리하고 임무를 다하지 않아서 무고한 사람을 죽게 만드는 행위도 사회적 범죄라고 생각하게 됐죠.(p47)”
서평의 마지막은 위의 문장으로 하고 싶었다. 위의 글은, 성수대교 붕괴 현장에서 조각난 시신을 처리하던 업무를 담당했던 시절을 돌아보며 권일용 프로파일러가 한 말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범죄와 무관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하여 무고한 생명이 죽었다면, 그 또한 ‘사회적인’ 범죄라고 그는 말한다. 중요한 위치까지도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이 또한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인 범죄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일어나는 크고 작은 알 수 없는 범죄들, 이 범죄들과 나는 무관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나는 결코 피해자가 될 일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유 없는 사건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일이라 방관하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최소한의 방법이 아닐까, 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