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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un 06. 2022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꽤 두툼한 책이다. 백과사전 같다. 하지만 책의 제목처럼 사랑에 관한 ‘단상’, 즉 생각나는 대로 적은 짧은 생각들이기에 읽는 데 어려움은 없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하고 (나는 평생 갈 책만 구입한다) 나의 집에 자리 한편을 내어 주기로 결심했을 때, 그때의 내 사랑은 연애 진행중이었다. 결혼하기 전이었다. 결혼과 연애가 다른 것은 만남의 형태뿐만은 아니다. 상대에 대한 감정도 기대도 상대와의 거리도 다르다는 걸 그때는 몰랐던 시절이기도 하다.   

   

# 사랑에 관하여     


책의 제목처럼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만약 결혼이 아닌 연애라는, 마치 강과 강 사이에 높이 걸려 있는 다리 위에 떠있는 상태라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마음을 흔들지 않을까. 연애하는 동안 우리들은 가끔 묻곤 한다. 나는 정말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이것이 사랑일까, 라고. 이런 의문에 저자는 ‘기다림’으로 답한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p67~68)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p68)”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이든 전화든 더 많이 기다리고 애타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기다림은 설렘과 기대와 함께 불안함도 동반한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마이너스적 감정이 불식되는 순간, 상대가 등장(연락)한 순간, 누구보다 더 큰 기쁨을 표현한다. 그게 사랑한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연애하던 시절, 이 말은 족쇄처럼 들렸다. 그도 나를 기다릴까, 라는 의문조차 족쇄처럼 느껴졌다. 기다리지 않고 싶지만 기다리고 있는 나를 벗어날 수 없는 족쇄.    

 

다정함: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다정한 몸짓에 기뻐하면서도, 자신에게만 그런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불안해한다.(p319)”   

  

흔한 말이다. 대단한 견해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말은 동서고금을 넘어 연인들에게 통용되는 감정이다. 나에게만 다정하길 바라지만 다정함이라는 성품은 인간에 대한 다정함일 때가 많다. 타인보다 조금 더 연인에게 다정할 뿐. 한 사람에게‘만’ 다정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사랑의 불순물로써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나오는 게 아닐까.     


소유의 의지: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p331)”     


길가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다. 너무 아름다워서 가지고 싶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꽃을 꺾어서 내 집 화병으로 들고 와서는 안 된다. 뿌리를 잃고 꺾인 꽃은 생명력이 없다. 하지만 ‘소유’에 대한 집착은 그렇게 내 집, 내 책상, 내 화병에 꽂혀 있어야 안심하게 만든다. 머지않아 그 꽃은 시들어 버린다. 뿌리를 잃었으니까. 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은 감정임을 연인들은 더 잘 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연인들, 혹은 부부들이 꿈꾸는 진정한 사랑의 형태는 이것이 아닐까.    

 

완전하나 결합에의 꿈. 사람들은 그 꿈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만 그것은 지속된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아테네의 묘비 위에는 죽은 사람을 영웅시하는 묘비 대신에 손을 잡고 있는 부부가 서로 작별을 고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제삼의 힘만이 파기할 수 있는 계약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기 <당신 없이는 나 또한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라는 표현을 완성하는 장례이다.’(p325~326)”   

  

# 간절함에 대하여    

 

이 책에는 사랑에 관한 단상만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더 사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부피가 주는 위압감을 다소 완화시킬 수 있다.   

 

불교의 한 공안(公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승이 제자의 머리를 오랫동안 물속에 붙잡고 있었다. 점차 물거품이 희박해지고,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스승은 제자를 꺼내어 되살린다. 네가 지금 공기를 원했던 것처럼 진실을 원할 때, 너는 비로소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리라.’(p36)”    

 

위의 문장을 읽고 간절함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간절함이란 감정은 삶을 나아가게 한다. 주저앉아 있다가도 일어서게 만든다. 나에게는 이 간절함이란 것이 부족한 것일까, 란 생각을 많이 했다. 간절히 알기 원하고 간절히 가지길 원하고 간절히 무언가를 배우길 원하고...   

  

간절함 끝에 찾아오는 배신감을 피하고 싶어서 간절함 자체를 회피하고 살았던 건 아닐까, 라고 나에게 묻는다. 간절함이 부족했던 거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간절히 원함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 앞에서 나는 ‘보다 강인한 간절함’보다는 배신감이나 회피, 더이상 간절해지지 않기를 배운 것 같다. 그런 나이기에 이 문장이 더 크게 다가온다.    

 

# 상처에 대하여      


자아는 상처를 받을 때라야만 말을 한다.(p88)”   

  

무섭고 안타까운 말이다. 그러나 수긍이 간다. 상처받았을 때 자아는 나타난다. 상처 없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래서 그럴까. 완전한 행복의 상태일 때보다는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쓰고 싶은 무언가, 그리고 싶은, 만들고 싶은 무언가가 더 많이 나온다. 굳이 이런 창작 욕구까지는 아닐지라도 상처를 받았을 때, 자기 자신 안으로 꽈리를 틀고 더 깊이 들어가 주저앉았을 때, 보다 더 나를 잘 들여다보게 된다. 평상시에는 보지 못했던 나를 더 깊이 만나게 된다. 그곳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나를. 그 순간이 사실 제일 괴롭다. 겉으로 드러난 자아와의 만남은 유쾌하다. 성격심리 테스트 결과처럼 타인과 공유하며 유희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처를 통해 드러난 자아는 술이 없으면 말할 수 없는, 혹은 평생 갈 사람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정도의 무게를 지닌다.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자기 자신조차 눈을 돌리고 싶은 진실이다.      


# 사랑에 대하여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정의 내리며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를 것이다. 하나로 확정 지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을 필요 또한 없다. 연인 간의 사랑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며 사랑은 고정불변도 아니기에 시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변한다고 해서 나쁜 의미의 변화만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럽고 순차적인 성질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일으키는 작용이 아닐까, 란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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