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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

김애란 그녀는 7개의 단편을 모은 이 책을 <바깥은 여름>이라 명명했다. 출간 소식을 접한 이후, 이 책을 처음 읽은 이후, 계속해서 이 제목을 생각한다. 한 여름을 찍어둔 핸드폰 속 사진을 훑어보며 처음 알았다. 내가 아름답다 여긴 순간들 속에 초록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그리고 초록이 이렇게나 아름답다는 것을 올 여름 처음으로 알았다. 여름. 그래 여름이다. 여름의 절정을 아름답다 여기며 사진으로 남겨 놓았었다. 바깥은 여름이다. 하지만 여름이면서도 여름이지 않은, 여름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연들이 있다. 그 사연을 모아 놓은 것이 이 책인 게 아닐까 싶다.


여름이라는 둥근 원과 그 원 밖의 소외된 자들. 우리는 행복하고 싶어질 때 그 원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나는 그런 일반적인 행복 따윈 관심 없어, 하다가도 행복을 공유하고 싶어지는 누군가가 있을 때는 그렇게 단순하지 못하다. 혼자의 행복이 아닌 너와의 행복을 꿈꾸기에 결국은 원 안에 들어가고 싶어진다. 김애란 그녀는 그 원 안과 원 밖의 소외를 여러 단편들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다양한 듯 다양하지 않은 소외의 모습들을.


“내가 온몸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삶뿐이며 삶을 증오할 때가 삶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삶을 온몸으로 그리고 있는 그녀의 소설. 나는 늘 눈을 돌리거나 연민하거나 내 마음대로 해석하곤 했다. 하지만 김애란 그녀는 삶에 대해 솔직하다. 내가 그녀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게 아닐까 오늘 또 다시 생각해본다.


한때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견디’던 시절이 있다. 겨울 너머가 끝이 아니라 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입동인데도 한파를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 봄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 봄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 봄이 반드시 온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마음. 여러 종류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울 너머에는 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전하는 것밖에 없지 않을까.


>첫 번째 이야기, '입동'(<창작과 비평> 2014년 겨울호)


지난봄우리는 영우를 잃었다영우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서 숨졌다오십이 개월봄이랄까 여름이란 걸가을 또는 겨울이란 걸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하고였다.(p21)”


‘지난봄, 우리는 영우를 잃었다’, 이 책의 첫 단편 <입동>은 이렇게 시작된다. 난임 치료를 받으며 두 번의 유산 끝에 어렵게 가진 아이. 이십여 년 간 셋방을 부유하다 처음으로 장만한, 지은 지 이십 년 된, 실면적 17평의 아파트. 그리고 이들에게 찾아온 아이의 죽음.


이 부부가 대단한 행복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부부는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하루, 그러한 평범함이 기적이라는 걸 알아가던 참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평범하게 사는 것, 보통이란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남들처럼 졸업 후 바로 취직해서, 남들이 보통 결혼하는 나이에 결혼하고 내 또래의 사람들처럼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고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것. 나에게는 이 ‘평범’과 ‘보통’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


아이의 죽음 후 부부의 집에 찾아온 시어머니가 실수로 복분자병을 따는데, 압력 탓인지 복분자 병은 폭발하듯 온 부엌을 붉게 물들인다. 시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시고 붉게 물든 벽만 그들 부부에게 남은 어느 날, 아내는 드디어 아이의 죽음을 극복하려는 듯, 주방에 튄 복분자 자국을 덮기 위해 도배를 하자고 말을 꺼낸다. 부부가 도배를 함께 하던 그때, 마지막 세 번째 벽지를 붙이기 위해 수납함을 들어 올리자 그 곳에는 죽은 아이 영우가 써 놓은 이름이 있었다. 이름을 다 쓰지도 못했다. 성하고 이응밖에 쓰지 못한 그 자국을 부부는 발견하게 된다.


아내는 한 손으로 영우가 직접 쓴아니 쓰다 만 이름을 어루만졌다. (...)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어 있었다풀먹은 풀이 내 몸에서 나오는 고름처럼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두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p37)”


풀먹은 벽지를 들고 있는 남편. 놓을 수도 놓지 않을 수도 없는 그 순간. 고름처럼 떨어지는 풀. 한파가 오려면 아직도 멀었건만 후들후들 떨리는 온몸, 두 팔. 그 부부에게는 아직도 한 겨울이다. 겨울을 넘기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이겨낼 수 없는 상실의 슬픔에 잠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 애도의 시간이 부부에게는 필요한 것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 ‘노찬성과 에반’(<릿터> 2016 8/9월호)


두 해 전 찬성은 아버지를 여의고 여름방학을 맞았다찬성의 아버지는 갓길에서 사고를 당했다.(p41)”


여덟 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찬성. 소년은 K시의 한 고속도로 휴게소 근처에서 할머니와 산다. 찬성이 에반 그 개를 처음 만난 건 아버지를 여의고 한 달쯤 지나서였다. 사람 나이로 치면 이미 칠순을 넘긴 노견이었다. 그리고 에반은 다리에 종양이 걸린 상태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애정이 필요한 시기의 찬성에게 누군가와 꼭 껴안고 자는 기분이 어떤 건지 처음 알(p51)”게 해 준 존재. 찬성에게 에반은 어떤 존재인 걸까. 이 단편은 유난히 모든 게 뿌였다. 찬성이 에반을 처음 만났을 때 에반이 찬성에게 남긴 무언가, 김애란 그녀는 그것을 “내면에도 묘한 자국이 생겼”다고 했지만 뒤이어 “그게 뭔지 몰랐다”고 말한다. 그리고 에반이 공과 함께 물고 오는 것은 “공이 아닌 다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게 무언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 “공인 동시에 공이 아닌 그 무언가가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표현도 쓴다. 하지만 역시나 “그 무언가”다. 불명확한 표현이다. 이 모든 것의 이름을 독자에게 맡기는 것일까. 나로서는 이것들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찾지 못했기에 이 단편에 마음이 쓰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있잖아에반나는 늘 궁금했어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p62)”


이 단편을 두 번째 읽었을 때조차 찬성의 아버지의 죽음을 사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숨 쉬듯 말하는 '주여 용서하소서'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지,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지 않았다. 한 소년과 한 마리의 유기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아버지의 죽음과 유기견의 죽음. 언뜻 그런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으니까.


찬성의 아버지. 암을 앓으시던 아버지가 선택한 죽음, 죽음을 앞둔 노견 에반이 고속도로에 뛰어든 이유.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알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자들. 아들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무력했던 할머니, 에반의 안락사 비용을 조금씩 조금씩 딴 데 써버린 찬성.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p81)”


가난으로 인해 죽음 앞에 선 누군가를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찬성은 ‘용서’라는 단어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용서라는 단어가 낯설게 보인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구하는 것이 용서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찬성은 에반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의 죄는 무엇일까.


>세 번째 이야기, ‘건너편’(<문학과 사회> 2016 봄호)


고요한 밤거룩한 밤누군가 찾아온대도 안개에 가려 결코 못 알아볼 것 같은 밤(p116)”, 한 여자는 한 남자에게 이별을 고했다.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공무원이 못 돼서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p115)”


제대 후 바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남자 이수와, 체대 졸업 후 뒤늦게 경찰공무원에 응시한 그녀 도화. 재수 끝에 그녀는 먼저 합격증을 받게 되고 그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다.


6년 동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본 뒤, 남자는 결국 공무원 시험을 접는다. 그녀와 같은 사회인이 되기 위해 직장을 전전한다. 진입 장벽이 낮은 대신 실적 압박이 커 스트레스가 심한(p99)” 곳,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거절과 모욕하대를 당(p99)”해야만 하는 그런 곳을... 그는 생각한다. 자기 인생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p99)”라고. 그리고 술 취한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인생의 작은 우연과 돌이킬 수 없는 결과교훈 따위 없는 실패를 떠올렸다지난 십 년간 자기 삶에 남은 것 중 가장 귀한 것이 뭘까 생각했다.(p93)”


술 취한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그는 결국 아무 답도 하지 못한 채 잠에 든다. 지난 십 년 간, 그의 삶에 남은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그에게 있어 그 소중한 것이 ‘그녀’는 아니었다는 것, 나는 그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만다.


처음 이 서평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그녀 도화가 이별을 말하는 이유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다”는 그 ‘어떤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물론 십 년이 다되어 가는 연인과 마흔을 앞둔 상태에서도 막연한 미래라면 불안할 게다. 그녀 자신만 안정된 직장이고 그는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돈이 대부분이었던 전세금을 자신 몰래 빼서 썼다면 그 배신감도 클 게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듯싶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이별을 드디어 꺼낼 수 있게 만든 것. 도대체 무엇이 매번 이별 고하기를 실패했던 그녀에게 이별을 말하게 한 것일까.


그건 이수가 “지난 십 년 간 자기 삶에 남은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때 그 소중한 것에 그녀는 없었다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 보통 이유가 없다고들 말한다. 이러이러해서 좋다는 건 결국 이러이러한 그 이유가 사라지면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 되기도 하니까. 이유를 떠올릴 수 없는 사랑. 그러나 이별에는 이유가 없을 수 없다. 이별에는 이유가 있다. 그녀 안에서 사라진 그 무언가. 그리고 아마도 그녀 뿐 아니라 그 안에서도 사라진 그 무언가...


>네 번째 이야기, ‘침묵의 미래’(<대산문화> 2012 겨울호)


<바깥은 여름>의 네 번째 이야기, ‘침묵의 미래’는 이 책 중에서 가장 나를 흔들리게 했고 가장 마음을 주고 만 단편이다. 어떤 책을 읽다가도, 일기를 쓰다가도, 허전한 마음을 홀로 쓰다듬다가도, 이 단편을 떠올리곤 했다.


이곳은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특별구역, 소수언어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세계에서 사라져가는 언어를 보존하고 연구한다. 이곳에는 천여 명의 화자가 살고 있다.


이곳에는 온갖 말들이 바글거리지만 그 말을 이해하는 것은 오로지 화자 자신뿐이다. 그리하여 이곳 화자들은 말을 향한말에 대한 지독한 향수병(p142)”이라는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간다.


소수언어박물관에 사는 세계에서 단 한 명뿐인 마지막 언어의 화자들을 바라보는 ‘나’, 이 단편을 이끌고 있는 ‘나’.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이다.(p125)”


같은 언어를 쓰는 모든 이는 죽고 살아남은 건 오직 자기 자신과 ‘말’뿐이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가쁜 숨을 토해내지만 아무도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단 한 명이라도 있기를 소망하다 결국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어떤 이들은 고독 때문에또 어떤 이들은 고독을 예상하는 고독 때문에 조금씩 미쳐갔다.(p130)”


<바깥은 여름>의 일곱 이야기 중에서 이 단편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마음이 끌린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 사고의 주제였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그것을 ‘말’이라는 소재를 통해 표현한 방식에 감탄한 듯싶다. 고독이나 소외를 떠올리면 공간적인 상황을 떠올리기 쉽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철저한 고독과 소외감, 외로움은 물리적인 상황이나 공간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곁에 있지만 멀게 느껴지고 만지고 있지만 차가울 때 더 고독해진다.


처음 이 단편을 읽었을 때는 특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었다. 언어와 문법이 통하는 누군가가 곁에 없는 특정한 사람들의 이야기. 하지만 서평을 쓰는 지금, 어쩌면 우리는 모두 유일한 화자이자 청자인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러한 자신만의 언어와 문법을 가진 각자가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을지 노력해가는 것, 그것이 관계를 맺는다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나에게 사랑은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너에게 ‘사랑해’는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미안해’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것이지만 나에게 ‘미안해’는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어와 문법이 같은 사람은 애당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 말을 선택하고 문장을 구성할 필요가 없으며. 통제하거나 언어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으며, 저절로 입에서 말들이 튀어나오며. 온몸이 가벼워지고 억누를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것이 언어가 통하는 관계에서의 기쁨이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한다.


내 안에서 빠져나온 언어들이 상대의 심장으로 들어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느낌. 너의 언어와 나의 언어는 같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점차 언어와 문법이 닮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모두 고유한 언어의 화자들이니까. 그렇기에 처음부터 같은 언어의 누군가를 찾는 건 불가능이며 노력을 통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만이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언어와 문법이 통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언어와 문법을 알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다섯 번째 이야기, ‘풍경의 쓸모’(<현대문학> 2014년 9월호)


이 단편에는 평범한 가정의 한 남자가 나온다. ‘평범한’이라는 단어를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젊은 여자와 바람난 아버지가 있고, 그 아버지를 끊임없이 욕하는 예순 두 살의 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시간 강사로 이 고장 저 고장을 전전하며 ‘성실한 강사’만 하면 된다는, 굳이 선생일 필요는 없다며, 강의 중에 졸거나 스마트폰을 만지는 학생을 적당히 모른 척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바람나 집을 나간 아버지는 젊은 여자의 병원비를 위해 아들에게 돈을 구하러 온다. 그때 안경을 올리고 핸드폰을 보는 노안인 아버지를 보고 아들은 놀란다. 김애란 그녀는 놀랐다고 표현한다. 왜 놀랐을까. 젊은 여자와 바람날 만큼 ‘젊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이 들어가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기에 마치 사진에 찍히지 못한 나머지 풍경이 버려지듯, 젊은 시절의 아버지만이 아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일까.


아버지가 꺼낸 핸드폰 화면에 있던 가정을 버리게 한 젊은 여자와 찍은 사진. 사진 속 두 사람은 등산복 차림이다. 그 두 사람 뒤로는 탁 트인 하늘과 울긋불긋 물든 겹겹의 산봉우리가 보인다. 그 가을 풍경 속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남자는 생각한다.


가을 풍경 속에 안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어쩐지 두 사람이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였다.(p182)”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의 얼굴을 한 그. 자신의 아버지였던 사람과 이제는 아버지라고 부르기 어렵게 만든 여자와 찍은 사진. 이 문장을 곱씹을수록 아버지는 처자식과 가정을 버린 사람이지만 어쩌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난 서두에서 이 남자를 ‘평범한 가정’의 한 남자라고 표현했다. 시간 강사로서 정교수가 되기 위해, 술 마신 교수가 운전하고 사고 낸 것도 자신이 운전했다고 거짓 진술을 하기도 한 그. 정말로 그는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한 사람일까.


만약 내가 십대라든가 이십대였다 해도 이 남자를 ‘평범’하다고는 표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는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지방으로 강의를 가며 버스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이 너무나 익숙해서, 풍경이 더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p158)”을 통해 서울 토박이로서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혜택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p158)”으며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p158)”를 절실히 깨닫고 있는 평범한 한 남자다.


바람난 아버지의 젊은 여자의 부고 소식이 문자로 왔다. 어떤 수사도 채근도 표정도 감정도 담기지 않은 부고訃告. 정교수 채용에는 또 떨어졌다. 교통사고를 낸 교수 대신 운전했다고 도와주었는데 바로 그 교수가 자신의 정교수 채용을 방해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는 생각한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p182)”


김애란 그녀가 일곱 편의 단편이 담긴 이 소설에서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문장이 아닐까 싶다. 바깥은 여름. 바깥은 여름이지만 볼 안은 겨울이다. 누군가의 여름과 누군가의 겨울. 누군가의 시차. 그것이 삶이라고.


>여섯 번째 이야기, ‘가리는 손’(<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K시 중학생 몇 명이 박스 줍는 노인을 폭행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았다. 그 동영상 안에는 다문화 가정의 한 남자 아이 재이가 찍혀 있다. 재이가 노인 폭행 동영상에 찍히면서 한 패라는 소문도 돌자, 혹시 아이가 상처 받지는 않았는지, 그 상황을 실제로 목격하고 많이 놀라지는 않았을지 걱정하던 엄마. 하지만 아이와의 대화 속에서 문득 생각한다. 불현듯 저 손동영상에 나온 손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p220)”고.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p220)”


노인에게 담배를 사오라고 시킨 그 인터넷 영상 속 십대들. 그걸 거절한 노인에게 발차기를 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그 아이들. 그리고 그 장면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인형 뽑기를 하던 재이. 노인을 향해 십대들이 뱉은 틀딱이라는 노인을 가리키는 비속어에 웃음이 터져 나온 재이. 쓰러진 노인보다 웃음이 먼저였던 그 아이.


그 아이들을 그렇게 키운 건 누구일까. 그저 부모만의 문제일까. 한 가정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그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단순히 이 일은 내 문제가 아니라고, 내 탓이 아니라고,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이 오늘날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 속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문제는 아니지만 어쩌면 우리의 문제이자 우리의 책임이라 여겨진 탓인지, 쉽게 잊혀 지지 않는다. 


>일곱 번째 이야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21세기문학> 2015년 가을호)


남편이 죽었다. 남편은 물에 빠진 제자를 구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들었고 결국 둘 다 살아 나오지 못했다. 남편의 부고를 들은 그 날은, 오랜 고민 끝에 아이를 갖기로 부부가 결심한 날이었고, 이제 엄마가 되기로 마음먹고 ‘엄마들이 만들’ 법한 김치 담그기를 처음으로 시도한 날이기도 하며, 남편은 금연을 결심한 날이기도 하다. 이 단편은 이렇게 남편을 잃은 아내의 목소리로 쓰였다.


남편의 부재가 남긴 흔적, 그것은 장미색 비강진이라는 원인 불명의 급성 염증 질환이다. 남편의 사망 후, 그녀의 몸에는 발그스름한 얼룩이 생겼다. 처음에는 분홍빛이었다가 과일처럼 발갛게 무르익은 뒤 검붉어졌고 나중에는 연한 갈색으로 변하며 비늘처럼 반질거렸다. 허물이 내려앉고 벗어지길 반복하며 살비듬이 내려앉아 흉하게 파들거렸다. 그녀는 생각한다. 나 자신이 벌레가 된 기분(p241)”이라고. 삶의 전부였던 남편이 사라진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의미처럼 여겨졌다. 그녀의 먹먹함이 전달된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잠시라도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내 생각은 안 났을까.(p265~266)”


제자의 목숨과 자신에 대한 사랑, ‘우리’의 미래를 저울질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알 것이다. 하지만 머리는 알지만 가슴에서는 끊임없이 죽은 남편을 향해 묻고 만다. 당신의 행복의 최우선이 내가 아니고, 당신의 삶의 선택에 최우선이 ‘내’가 아닌 사실이 섭섭한 그녀.


죽음에 대한 글, 영화는 흔하게 접할 수 있지만 쉽게 다룰 수 없는 주제다. 자신이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죽음은 간접적이며, 모든 죽음은 물론 그 죽음을 지켜보는 이들의 감정 또한 개별적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생각 또한 쉽게 쓰기 어렵고 간단히 정리될 수 없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자에게 건넬 수 있는 위로의 언어(위로라는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를 나는 갖고 있지 못하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 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인간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 살아내는 것, 그것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무래도 좋을’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 ‘완전히 그리고 굴절없이’, ‘다 살아내는 것’ 그것이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고 헤세는 말한다. 아무 이유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p237)”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견딜 수 있는 방법, 정답 같은 방법은 없을 게다. 죽음은 아닐지라도 한때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을 사랑의 식음이든 어떤 이유로든 마음속에서 지워야만 할 때의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삶이란 아름답고 행복한 빛깔만이 아니니까.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삶이라는 김애란 그녀의 표현에 다시 한 번 마음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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