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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넓이를 가진 가까움에 대하여

넓이를 가진 가까움에 대해 생각한다. 한병철의 책 <투명사회>에 나온 개념이다. 진정한 친밀함은 넓이가 있는 가까움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에 대해 생각한다.

디지털 매체의 소통은 숨 막히도록 빠르다. 나의 글은 길어질 수 없다. 글은 짧고 빠르게 전달된다. 당신의 읽음은 1이 사라지는 순간 확인된다. 1이 사라졌음에도 답글이 오지 않으면 그 시간이 비록 1분일지라도 길게 느껴진다. 그 1분도 기다리기 힘들 때도 있다. 그 1분에 상대에 대한 믿음이 유혹받기도 한다. 하지만 편지는 다르다. 편지는 길게 쓰여지길 원한다. 디지털 매체에서처럼 신속, 빠름이 생명이 아니다. 숙성과 발효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편지는 서로가 기다려준다.

디지털 매체는 ‘발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글은 내 글이 아니게 된다. 내 손에서 떠난 글은 상대에게 도착하고 그가 그 글을 읽고 다시 나에게 던져서 내 손에 닿을 때까지가 모두 상대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너무 길고 참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편지는 다르다. 편지를 쓰기 전부터 생각하고 한 글자 한 글자 적으며 생각하고 다 쓴 후에도 편지지에 적힌 글자를 바라본다. 바라보며 생각하고 그리고 편지지를 접고 봉투에 넣고 받는 이의 이름을 적고 그리고 보낸다. 내 손에서 편지는 떠났지만 상대에게 가고 있는 그 중간에도 나는 편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의 읽음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그 편지는 내 영역에 속한다. 쓰지 말아야 할 말은 쓴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받는 답장은 느리지만 깊다. 아니 진정한 의미에서는 느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계속 생각한다. 미처 편지에 쓰지 못한 글을 혼자서 계속해서 답장을 쓴다. 설거지를 하면서 방을 정리하면서 거리를 걸으면서 물을 마시면서 손을 씻으면서 쓰지 못한 답장을 혼자 쓴다. 느리다, 길다, 깊다. 이러한 편지의 속성이 <투명사회>에서 말한 ‘넓이가 있는 가까움’이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 이 넓이를 기다려주지 못하고 1이 사라지고 수신확인이 되는 순간부터 답을 요구하는 오늘날의 가까움은 때론 숨이 막히다. 


한병철은 그 책에서 나르시시즘, 우울함에 대해 자기 자신과 지나치게 가까워서 생긴 병이라고 말했다. 넓이가 없는 지나친 가까움이기에 우울함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럼 넓이를 가진 가까움으로 자기 자신과 지낸다면 우울하지 않다는 것일까. 그럼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넓이를 가진 가까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정확한 표현은 잊었지만 공허와 부재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공허와 부재의 고통을 견디는 것이, 넓이를 가진 가까움이라는 듯 했다.

넓이를 가진 가까움, 마음에 드는 말이다. 바라보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다. 넓이가 필요하다. 너무 가까우면 보이지 않는다. 멂의 고통을 견디는 순수한 가까움, 이라는 말. 넓이를 가진 가까움이라는 말. 가지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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