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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이병률, 그리고 여행

“죽는다는 것은 (...) 매일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다. (...)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매일 버리는 것이다. (...) 모든 것을 버린다면 두려움은 끝날 것이고, 그러면 거기에 새로워짐이 있다.”


니체의 책이었던가. 어디에서 읽은 지는 잊었지만 수첩에 손으로 적어놓은 구절이다. 나는 죽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워지지 못한 듯싶다. 어제의 나를 짊어지고 있기에 새로운 오늘을 맞이했음에도 어제의 나를 끌어안고 있다. 죽어야 새로워질 수 있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등 다수의 작품을 쓴 이병률 저자의 강연을 어제 들었다. 아마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당신의 말을 통역했다. 저자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도 나의 의지로 언제든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로서 통역할 수 있는 기회는 ‘아마도’ 두 번 다시 없을 게다.


“통역사 님이 제일 제 말을 잘 들어주시는 것 같아서요.”


회의 통역에 들어갔을 때 한 과장 님이 회의 중에 유난히 나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회의를 진행하던 부장 님이 보다 못해 우리도 좀 쳐다봐주라며 농담처럼 건넨 말에 그 과장 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과장 님의 대답을 들은 이후 그 말이 아직까지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이번에 이병률 작가의 강연을 통역하며 또 한 번 생각했다. 누군가의 말을 주어부터 시작해서 ‘~은/는, ~이, ~을/를’ 등의 조사는 물론 토씨 하나까지 귀기울여 듣고 그 안에 담긴 의미에 대해 생각해 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라고.

이병률 작가의 강연을 들으며 처음으로 들은 목소리의 톤은 물론 발음, 단어를 고르기 위해 강조하기 위해 말의 속도를 늦추던 시점, 때론 좀 더 나은 표현으로 수정하기 위해 발화를 수정하던 지점. 마치 내 자신이 이병률 작가가 된 것처럼 작가가 풀어놓는 언어의 바닷속에서 헤엄을 쳤다.


여행이 역병처럼전염병이 된 시대


이병률 작가는 여름 휴가를 맞이하여 내면의 쉼표를 줄 수 있는 여행에 대한 강연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여행에 관한 다른 작가들의 글도 소개해주었다. 혼자서 떠나는 여행, 자기 자신과 만나는 여행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가 강연의 마지막에 꺼낸 말은 ‘여행이 역병처럼, 전염병처럼 번진 시대’라는 표현이었다. 여행이 전염병이 된 시대. 돈이 있기에 떠나는 시대. 그 강연을 듣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쩌면 그 전염병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매일매일 회사에 얽매여 끌려오듯 출근하고 눈치 보며 퇴근하던 일상을 벗어나, 간신히 자유가 될 수 있는 시간, 여름 휴가. 하지만 그 정해진 기간에 갈 수 있는 곳, 가고 싶은 곳도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관광객이 들썩이는 그런 곳이다. 마치 회사에 출근하듯 몰려간다. 일 년에 정해진 날짜의 휴가를 소모하기 위해, 혹은 ‘휴가 때 뭐했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혹은 어렵게 생긴 휴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낭비하지’ 않고 싶어서 많은 이들이 떠난다. 짧은 시간 안에 효율적이고 가시적으로 남길 수 있는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떠난다.


여행이 필요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행을 떠나라고 그렇게 외치던 그가 강연 말미에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필요 없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라고. 사실 난 왜 여행을 떠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 내가 찾은 여행의 이유는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장소는 나를 유혹하지 못하지만 사람은 나를 유혹한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그곳은,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 어딘가는 나에게는 여행의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이병률 작가는 말한다. 혼자 떠나라고. 누구보다 자신의 책에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운 그가 혼자 떠나라고 말한다. 그에게 여행은 어쩌면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본다. 그에게도 여행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다. 나는 이미 아는 관계 속 사람과의 여행이라면, 그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여행일 듯 싶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떠나라고 말한다.


나는 여행이 필요한 사람일까. 여행이 나에게는 필요 없다고, 아직은 그렇게 생각한다. 나를 움직이게 할 만큼 강렬하게 나를 유혹하는 곳이 아직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병률 작가의 강연을 들으며 어쩌면 단순히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혼자 여행의 두려움은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반드시 무언가를 보고 느끼며 나의 시간을 투자한 만큼의 무언가를 얻지 못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나에게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감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점심 식사 후 바로 시작된 강연이었고 매일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회사에서 내면의 성장이 중요하고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게 좋다는 그의 말. 가능하면 한국인이 적은 곳에 가고 대부분의 지역 주민들이 직업이 없는 빈국에 가서 그들처럼 길가에 앉아 하루종일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밥을 얻어먹는 여행을 한다는 그. 그런 그의 삶의 방식을 이해까지는 아니지만 호감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라는 마음으로 청중과 작가를 바라보았다. 나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아끼는 작가고 내가 사랑하는 글을 쓴 작가지만 회사라는 그 공간에서 과연 그와 같은 온도를 가진 이는 몇이나 될까, 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강연 말미에 청중들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다. 가능하면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도저히 질문하지 못했지만 묻고 싶었다.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이상형이라 말한 ‘단감 같은 사람’에 대해. 강연 후 동료와 ‘단감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달고 떫은 두 가지 맛이 공존하는 점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겠다. 나는 단감의 다양한 모습이라 생각했다. 딱딱한 그 자체로도 맛있지만 곶감으로도 먹을 수 있다. 놔두면 연시가 된다. 시간이 들어 있다. 나쁜 남자에 끌린다고 했던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동료는 그런 자신의 이상형을 이병률 작가의 단감 표현에 이입시킨 건 아닌지란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나에게는 시간이 언제나 중요‘했’다. 아마도 지금도 중요‘하’다. 맞고 안 맞고 보다 어쩌면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함께 맞추어갈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단감'을 '시간'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결국 묻지 못했다. 사인도 다른 이에게 부탁해서 대신 받아야 했기에 아쉽게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비가 나뭇잎에서 여러 날 쌓인 먼지를 씻어내듯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책에서 말했다. “사랑은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다”고. 사랑은 오직 현재의 개념이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나에게 이유없이 주어진 이 삶을 사랑하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이 ‘하고 싶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기도하는 희망이 아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문장을 만난 이후, 내 삶을 제대로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 매 순간을 살고 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런 말도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그것은 당신이 찾지 않고 원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쉽게 움직이지 않는 나에게 던진 그의 말. 인생을 사랑하고 싶은 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른다는 것은 아무 것도 결국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고 싶다'에 그치는 건 하지 않음과 같다. 원하고 바라고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사랑에 대해 이렇 말한다.


“당신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 당신은 공포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의존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질투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책임과 의무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자기 연민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사랑받지 못함에 대한 괴로움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겸손이 자만의 반대인 것만큼 사랑은 증오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 등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없앨 수 있다면, 즉 강제로가 아니라 비가 나뭇잎에서 여러 날 쌓인 먼지를 씻어내듯이 그것들을 씻어낼 수 있다면, 비로소 당신은 인간이 항상 목마르게 찾는 그 기묘한 꽃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여행이 필요한 사람인 걸까.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수많은 '싶다'들을 '하고 있다'로 바꾸기 위해 매순간을 사는 게 전부일 뿐이다. 내 삶을 사랑하고 싶고 내 자신으로 살아갈 용기를 가지고 싶고 나 자신과 친해지고 싶고 그리고 항상 목마르게 찾는 그 기묘한 꽃도 만나고 싶다. 이 수많은 ‘싶다’ 투성이의 이야기들은 말로 꺼내지 않으려 한다. 조만간 희미하게 사라져버릴 수많은 ‘싶다’, ‘할 것이다’의 희망과 계획, 꿈은 더 이상 나에게는 필요 없다. 말로 꺼내지 않고 이미 몸이 움직이고 있을 때 진정 원하는 것이라고 나에게 말한다. 내 안으로 삼킨 수많은 희망의 숫자만큼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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