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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나에게 말한다

나에게 말한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인생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1.

한 달 전부터 계속 책상 위에 쌓여있던 책들을 정리했다. 책꽂이에 돌려놨다는 의미의 ‘정리’가 아니라, 좋아하는 구절들 사이사이에 꽂아둔 종이를 하나하나 빼면서 워드화하는 작업을 끝마쳤다는 의미다. 계속해서 읽어나가고 정리해야 하는 책들이 계속해서 쌓여 갔다. 정리하지 못한 감정처럼 높아져 갔는데 드디어 모두 정리했다. 이제 새로 주문한, 새로 빌려온 책들에게 미안함 없이, 미련 없이 마음을 줄 수 있게 되었다.


2.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자, 책을 일 년에 한 권도 잘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동료가 물었다. 아무리 읽어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 버린다고. 그래서 안 읽게 된다고. 나와 내 자리 뒤에 앉는 시를 좋아한다는 한 청년은 동시에 얼굴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좋아하는 구절을 정리하면 된다고. 그럼 덜 잊혀 진다고.


어차피 잊을 테니까 읽지 않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한 권의 책 전부를 외우려는 생각 자체가 나는 없다. 문장을 기억한다기 보다 느낌을 기억한다. 그 책을 통해 어떤 온도의 마음이 되었는지, 어떤 따뜻함이었는지. 그것은 한 사람에 대한 느낌과도 닮아 있다. 한 사람과 만나 나눈 대화를 우린 전부 기억하진 못한다. 하지만 대략적으로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야 라고 말할 수는 있게 된다. 책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 작가의 그 책은 이러이러한 느낌이라는 식으로 남는다. 물론 그 중에서 유난히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나 단어는 특별히 남는다.


이병률 작가는, 나에게 있어 시인이라기보다는 여행과 사랑을 사랑하는 산문가다. 바람이 불면 이병률 작가가 떠오른다. 예쁜 단어를 보면 자신만의 언어의 사전을 만든 김소연 시인의 ‘마음 사전’이 떠오른다. 그녀라면 이 단어를 어떻게 풀이했을까 라고. 그리고 삶 속에서 우연히 사람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장영희 교수의 따뜻한 글들이 떠오른다. 그녀라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감동적이면서도 미소 짓게 풀어내실까 라고.


3.

나이 먹어가는 것은 사실 좋은 건 아니다. 기계가 오래되면 메인터넌스가 필요해지듯 우리 몸도 이쪽 저쪽 아파진다. 자랑할 만큼은 아니지만 일년에 병원 한 번 가지 않는 나이지만 오래 쓴 부분들이 조금씩 아파지고 있다. 눈의 시력이나 오랜 컴퓨터 작업으로 인한 손목 통증, 혹은 어깨 결림, 걷는 걸 좋아하다 보니 생긴 무릎 힘즐의 염증 후유증 같은 미세한 통증. 병원 갈 만큼의 아픔도 아니지만 그런 순간 나이를 먹었구나를 느낀다. 이제 나란 몸(기계)에게도 유지, 보수 관리가 필요한 시기구나, 라고.


피부나 건강으로도 충분히 나이듦을 절실히 알기에 나이듦이 반갑지만은 않지만 그럼에도 반갑게 느껴지는 순간들 또한 분명 있다. 20년 가까이 만난 친구들과의 모임이 시간과 함께 오래 숙성된 느낌이 들 때. 나의 모나고 유별난 모습마저 그들 속에 이렇게 녹아들어 있구나를 느낄 때 고마움과 미안함을 넘어 이제는 미소가 남는다. 함께 나이 들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이구나, 라고. 뽀족뽀족했던 모난 부분들이 시간과 함께 둥글둥글해지고 있다.


4.

친구들과의 모임 전에 어떻게든 쌓인 책들을 조금이라도 정리하고 싶었다. 일부러 일찍 일어나 서둘러 책 속 구절들을 정리하고 서평을 쓰고 나갔다. 알랭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이다. 그는 책에서 말했다. 사랑과 불안은 함께 간다고. 그 책의 서평을 쓰며 나의 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사랑과 함께 찾아 오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 언제나 움츠려 들던 나를.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 7년이 된 친구는 말했다. 스물 초반의 남자 동료가 자신에게 물었단다, 엄마가 되서 무엇이 좋냐고. 그 질문이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나 또한 친구의 정확한 모든 문장이 떠오르진 않지만 이런 질문과 이런 답이었다. 엄마가 되어서 불안해졌다고 한다. 너무나 소중한 딸, 존재가 생겼기에 언제 잃어버리진 않을까 잘못 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친구가 ‘엄마가 되어서’ 라는 문장을 발화하고 그 다음 ‘불안’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그 사이는 사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엄마가 되어서’ 라는 다음 문장을 내 마음대로 상상했다. 희망이나 즐거움, 힘들지만 행복하다, 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기대했다. 하지만 친구의 입에서는 ‘불안’이라는 단어를 말했다. 알랭드 보통의 책이 떠올랐다. 그리고 친구 옆에서 천진난만하게 장난치고 있던 친구의 딸을 보며 친구에게 이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커다랗게 느꼈다.


사랑과 불안에 대한 관계는 이미 알았고 느꼈던 적도 많았고 도망친 적도 있는 관계다. 그럼에도 엄마의 입장이 되어 말하는 친구의 그 말이 하루가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말을 하던 그 친구의 표정도 그 카페의 배경도 지워지지 않는다. 너무나 사랑해서 불안하고 너무나 소중하기에 불안하다고. 이 불안은 내가 모르는 불안이다. 어쩌면 나는 평생 알지 못할지도 모르는 불안이다. 엄마로서의 친구는 아직도 낯선 나에게, 그녀는 그렇게 가끔씩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딸에게 대하듯 나의 음식을 덜어주고 챙겨줄 때 그녀의 엄마의 모습을 본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옷차림이 아름답게 보인다. 아이를 돌보면서 집안일하고 직장 다니면 힘들지 않냐는 또 다른 친구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한다. 편하진 않지만 그냥 이것이 나의 삶이라고. 누구와 비교하며 더 힘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를 돌보고 챙기고 출근하고 집안일 하는 그런 것들이 그냥 자신의 삶이라고.


5.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평일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느낀 주말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길거리에서 한 시간 이상 기다려본 적도 없는 내가, 언제 올지, 오긴 하는지도 모르는 버스를 한 시간 넘게 추위에 떨며 기다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것, 불확실성에 기대며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염없이 기다리면서도 불안하지 않았던 그 한 시간이 의외로 길지 않았다. 어쩌면 기다림은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만큼 괴롭고 무서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인생이 바뀌지 않을거’라는 책 속 한 구절을 수첩 맨 앞 페이지에 적는다. 나에게 말한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인생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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