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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쌩전 Sep 21. 2021

아저씨 방구에 대한 고찰

낯익은 사건의 낯선 감정에 대하여


아저씨들에게 방구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자신있게 소리까지 내며 방구 끼는 아저씨를 만나는 건 낯선 일이 아니다.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다가 진동과 소리를 동시에 느낀 적도 있고 심지어 밀폐된 공간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한 적도 있다. (이 때를 매우 위협적인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사건들을 반추해봤을 때, 그들은 겸연쩍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으며 매우 당당했고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의 겉모습을 통해 살아온 세월을 유추해보자면 사회성이 결여되거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로 매도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들의 입장에서 최대한 이해해보기 위해, 혹시 노화로 인해 괄약근 조절에 무리가 생겨서 그런게 아닐까 걱정스런 마음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파열음의 데시벨을 고려해보자면 불가피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흘러나온 사고가 아님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터질듯한 그 소리의 임팩트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파괴력으로 인해 없던 질환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아저씨의 방구는 마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역할처럼 사전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지며, 그 후 주변인들을 대하는 뻔뻔함을 통해 후안무치함을 드러내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이로써 아저씨들의 방구는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주장에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생물학적 현상 너머 사회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했다.


나의 가설은 이렇다. 아저씨들은 자신들의 생리적인 카타르시스를 사회적인 에티켓보다 좀 더 상위에 놓고 있으며, 오히려 주변인(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타인)들에게 날것의 생리현상을 강력하게 어필함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남들을 괴롭히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하는 어린 골목대장처럼 말이다.


난 개인의 쾌락이 타인의 불편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본다. 아저씨들의 방구는 일면 농담으로 소비할 수 있는 가벼운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이 생에 계속해서 반복된 경험이 되면서 어느 순간 더는 웃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순간을 맞이했을 때 주변 공동체에게 진지한 위로를 구할 수 있게 되려면, 이저씨들은 사회적 합의된 예의를 토대로 스스로 자정할 수 있을만한 수준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방구를 그만 끼라는 얘기가 아니다. 비록 나는 담배를 끊었지만, 담배를 피웠을 때처럼 길을 걷다 종종 인적이 드문 골목이나 주차장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다. 그렇다, 나도 이제 ‘아저씨’임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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