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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쌩전 Oct 09. 2024

예술과 의미에 대한 질문들

넋두리 다이어리 19

최근 들었던 질문 중에서 머릿속에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 있어서 적어보려고 한다. 나는 뒤끝이 있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남이 보기엔 아닐 수도 있다) 대화를 하거나 발표를 하는 와중에 어떤 대답이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을 때 계속해서 생각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생각하다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떠올리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생각이 조금 더 나아가기도 한다.


이번에도 딱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그냥 조금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하는 목적이 크다. 오히려 적고 난 뒤에 혼란, 그 자체를 더 명확하게 인지한 채 도망칠 수도 있다. 그 점은 미리 고백하고자 한다.



Q. 광고는 예술이 아닌가요?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자리에서, 내가 문학도 예술이니까,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누군가 물었다. (일부러 공간과 대상을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정되거나 특정하지 않기 위한 의도다.) 나는 그 자리에서 광고는 예술이 아니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조금 더 생각한 것들을 적어보자면 이렇다.


광고는 우선 만드는 입장에서 예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엔 ‘내가 생각하는’ 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나는 예술은, 미학적 목적, 혹은 예술적 탐구를 목적으로 순수하게 작품에 집중해서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광고는 굉장히 자본주의와 비즈니스 안에서 명확하게 기능적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인지도를 얻기 위해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건 그 과정에 있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도 예술가의 것이 아니고, 발표된 이후에는 수용자의 영역으로 넘어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광고는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광고대행사가 만들었지만 제작물의 권리는 광고주에게 있고, 광고주는 명확한 의도에 맞는 실행을 위해 제작물을 적합한 예산에 맞춰 사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를 주문하고 의도에 맞게 만들고 납품하는 일이기 때문이 오히려 예술보다 기술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에 가깝게 얘기될 수 있는 두가지 관점이 있다.


한가지는, ‘예술적’일 수는 있다는 것이다. 표현에 있어서 직접적이기 보다는 간접적인 표현을 통해 감정적 변화를 유발한다거나, 짧은 시간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예술적 집요함을 발휘하여 디테일을 챙기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다’와 ‘인간적이다’라는 말이 서로 완전히 의미하는 바가 다른 것처럼, 광고는 예술은 아니더라도 예술적일 수는 있다.


그리고 두번째는 수용자의 입장이다. 수용자에 입장에서는 예술처럼 수용할 수 있다. 수용자의 입장에서 예술적 경험은 모든 것에서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아주 너그럽고 포용적이다. 우리는 꼭 예술작품을 통해서만 예술적 감동을 느끼진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자연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며 예술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리고 신의 작품이라고 말하며 감탄한다. 그건 실제 대상이 ‘예술’인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감동을 느꼈기 때문에 역으로 대상에서 ‘예술적’인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대화중에 어떤 표현, 혹은 어떤 요리, 시선, 관계, 모든 것에서 가능하다. 광고도 하나의 미디어이자 콘텐츠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생각, 아이디어와 표현이 가득차 있다. 누군가 그것을 보고 재미와 감동, 의미를 느낄 수 있고 그것은 예술적 경험이라고 충분히 불릴 수 있다. 수용자의 입장에서, 광고를 보고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내가 말한 건 순전히 제작의 입장에서다. 내가 소설을 쓰고 있지만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고 출판도 되지 않아서 ‘소설가’라고 불리는 것은 미흡할지 모르지만, 소설을 끊임없이 쓰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다면 ‘예술’을 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15년 가까이 광고를 만들고 있지만, 나는 단 한번도 ‘예술’을 하고 있다고 자각한 적은 없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한 것이다.



Q. 예술에 꼭 의미가 있어야 하나요?


실제 질문하고는 좀 차이가 있다. 사실 하나의 질문이 아니었고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가면서 생각해봤던, 혹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내 안에서 계속 파고들었던 질문을 요약하자면 저런 것이다. 원래는 문학에서 시작했지만, 일단 예술로 확장해보았다.


그래, 꼭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하지만’이라는 말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꺼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왜 나는 발끈하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같이 일했던 스타트업 몇 군데가 있었다. 다들 정말 열심히 일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시키지 않아도 몰입했고, 일상의 대부분을 일로서 시간을 보냈고, 그게 마치 그 사람의 인생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까지 하세요?’

그럼 그들은 말한다.

‘그러게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자꾸만 차오르는 의지나 욕망, 비전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도 차오르는 그 질문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일’로서 보여주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어찌보면 그 사람들이 하는 일 자체가 왜? 의 대답이다. 이유, 나는 그것이 ‘의미’와 닮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존박의 유튜브 채널에 이적이 나온 영상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비비의 ‘밤양갱’을 만든 장기하에게 이적이, 노래에 나오는 부분 중에 ㄴ과 ㄹ의 연음을 사용하여 기가막히게 이어지도록 만든 구절이 있는데 그게 너무 잘만들었다고 이야기했더니, 장기하가 자기가 그 이야기를 꼭 듣고 싶었는데 형이 처음 말했다고 했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디테일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그런 거라는 이야기였다. 대중이 그걸 보면서 ‘와, 여기서 연음을 사용해서 발음이 거슬리는게 없이 부드럽게 흘러가니까 너무 좋다’ 라고 할까? 대중은 그냥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기똥차게 별로라고 안다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야하는 것이라고. 무슨 의미가 있어? 다 그런 의미가 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흑백요리사도 그렇다. 안성재 셰프는 몇 번이나 심사에서 ‘의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의도가 제대로 표현되었는지, 제대로 구현되고 전달되었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냥 맛있으면 되는거 아니야?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냥 맛있는 것을 넘어서, 진짜 자신이 추구하는 맛을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 그건 다 디테일하게 짜여지고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의 노력과 생각이 ‘맛’이라는 콘텐츠를 통해 상대에게 전달된다. 거기서 결국 ‘아, 이걸 이렇게까지 했네’가 아니라 ‘와 맛있다’라는 식으로 심플하게.


물론 의도라는 것은 실제 의도보다 더 해석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하고, 때로는 오역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 의미, 의도, 이유, 이런 것들이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가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공격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관대함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상태일 뿐이다. 왜 그렇게 까지 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있다. 누군가 그렇게 하면, 그냥 그렇다고 볼 수도 있는데 왜 그걸 뜯어 말리려고 하고 심지어 폄하하기 까지 할까. ‘나는 왜 저렇게 애쓰는지 모르겠어’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더러 있다.


심지어 예술을 하겠다는, 뭔가를 만들어보겠다는 사람이라면, 의도를 가지고 디테일을 고민하면서 만드는 사람들의 존재를 폄하하기보다는 그런 사람도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최근에 읽고 있는 ‘도서관’에 대한 책에서 저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도서관에 간다는 것은 자신이 ‘무지’할 수 밖에 없음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일이라고. 도서관에 있는 책을 평생을 걸쳐서도 다 읽지 못할거라는 걸 알고, 자신이 읽지 못할 책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술이 꼭 의미가 있어야 하나요? 와 같은 질문에 O, X의 답이 있긴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YES, NO로 대답하지말고 그것 사이에 눈금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의미가 있는 예술과 없는 예술이 어느정도 있을지를 고민한다거나,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선호와 기호에 따라 이해의 범주 바깥에 있는 것을 혹시 함부로 폄하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되새기며 관대함을 지니기 위한 무지를 자각하며 다시 질문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완전할 수 없다. 아니, 세상 어떤 것이 완전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나’와 ‘지금’을 기준으로 상태를 잘라내야만 한다. 변하지 않는 본질 같은 건, 우리가 결국은 사라질 필멸자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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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신경 안쓰고 사는게 제일 어려운 줄 알았는데, 사실 더 어려운 건 ‘나’ 신경 안쓰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이번 글도 적어놓고 자기검열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냥 다음 이슈에 신경쓰는 것이다. 오늘은 밤이 아직 길다. (야근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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