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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쌩전 May 11. 2017

오색팔찌



 평일 저녁, 인사동의 입구에서 그녀는 그를 떠올렸다. 추억 속에 묻혀있던 기억 속에 잊혀졌던 그를, 아주 생생하게 떠올렸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손을 흔들며 걸어나올 것만 같았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얼굴 가득히 머금은 채 말없이 눈빛으로 자신을 반겨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때처럼. 그러나 걷지도 못할만큼 몰려있는 사람들 얼굴 속에서 그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모여있다 해도 그는 이곳에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와 만날 적에 자주 종로를 찾았다.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 그들은 사랑을 나눴다. 정말 사랑이었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때는 사랑이었다. 지금에 와서 왈가왈부할 필요 없다. 그 땐 진심이었고 진지했다. 그는 언제나 순수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참 좋았다. 그에 대한 기억들은 여전히 가득하다. 아직도 친구들을 만나며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꺼내어 웃음짓는 일이 많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즐겁고 천진난만하던 시절이었다. 종로 길거리에서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앉아서 팥죽을 드시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먹고싶다며 할아버지들 사이에 앉아 팥죽을 먹었던 일. 커다란 뱀을 꺼내놓고 약을 팔던 약장수를 구경하며 눈빛을 반짝이던 일. 포장마차에서 거나하게 취해 취한 아저씨들과 흥분하며 정치얘기로 뜨거웠던 일. 프리 허그를 하던 청년을 너무 오래 껴안고 있어서 청년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일. 그는 언제나 종로에 수많은 허름한 아저씨들에게 천원짜리 지폐를 그렇게도 잘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밤늦게 종로의 길바닥에서 아저씨들과 술판을 벌인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는 끝없이 나열하고도 고개를 돌리면 다시 또 생각날만큼 많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남겨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그녀의 기억 속에 숨어버렸다. 추억이란 허울좋은 상자 속에 갇혀서 그녀의 가슴 속 깊은 곳에 꽁꽁 숨어들었다. 그녀는 그를 잊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렇게 이야기 거리가 되어 가끔 꺼내어 보는 것이 더 좋았다. 그게 더 사랑스럽고, 그를 위해서도 더 좋은 거라 생각했다. 힘들지 않았고, 힘들 때 도움이 되기도 했다. 가슴 한 켠에 언제나 따뜻한 부분으로 남아 나중에도 얘기할만한 추억거리가 되어준 그가 고마웠다. 원석처럼 거칠고 투박한 기억을 다듬고 세공해서 남은 반짝이는 작은 보석만 추억이란 상자에 담아두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그녀의 현재와 미래 속에서 그는, 더이상 없었다. 이제 그녀의 과거 속에 살아있는 그에게 감사할뿐, 그에 대한 생각은 이제 사치와도 같았다.


 그런 그녀가 다시 그를 떠올렸다. 해가 어슴프레 져가고 있는 저녁.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인사동에서 불현듯.


 인사동에서 있었던 한 추억이 있다. 연애의 중반기쯤 되었을까. 연애 곡선의 내리막길이 눈 앞에 닥쳐왔을 때였던 것 같다. 아마 그가 너무 프리허그하는 청년을 너무 오래 안고 있었을 때였다.


 "뭐야, 너. 저 사람 당황하는 거 봐. 다른 마음이라도 품었는 줄 알걸?"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래야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거야." 그가 대답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상대방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익숙했고,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국경이라던가 도덕적인 편견에도 구애받지 않는 듯 했다. 처음엔 그런 초월적인 성격에 호감을 가졌었지만, 누구보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그녀의 성격은 그런 모습에 점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평등한 그만의 세계에서 그는 자신 조차도 평등함속에 묻어 두었다. 자기 자신조차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는 그의 세계에서 그녀는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사랑이었지만, 그건 너무 지나친 요구였고, 결국 그녀는 지치고야 말았다. 어쩌면 그도 그것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게 분명했다. 좋은 것은 남에게 주고 나쁜 것은 자신이 품는 것에만 익숙했다. 웃어주는 것에만 익숙했던 그에게 다른 것을 생각할 틈 따위는 없었다. 그는 언제나 남에게 웃어주고, 남에게 주는 것에 너무 바빴었기 때문이다.


 그 날도 종로 어귀에서 밥을 먹고 걸어서 돌아다니다가 인사동에 가게 되었다. 언제나 한가했던 시절이고, 남는 건 체력뿐이었다. 할일도 없는데다가 한가했기에 사람구경도 하고 사람과 더불어 여러가지 구경할 거리가 많은 인사동은 시간 때우기에 좋았다. 그와 나는 입구부터 찬찬히 걸어 들어갔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젊은 사람들도 외국인들도 많았다. 쉽게 휘젓고 걸어다닐 수 없었다.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정성들여 걸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은 따뜻했고, 그의 애정이 전해져 오는 듯 했다.


 "어, 저거 봐." 그가 말했다. 그는 한 노점상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예쁘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나무로 된 행상 위에 팔찌와 목걸이 반지 귀걸이 등, 빛바래거나 어설픈 티가 나지만 인간미 가득한 악세서리가 그득했다. 노점상 주인 아저씨는 챙이 넓은 새빨간 모자를 쓰고 있어서 그녀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너무 새빨게서 내심 놀랐던 그녀는, 그 빨간 빛이 지나치게 진지해보여서 웃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모자의 진지함과는 사뭇 다르게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


 "이쁘지? 자네 여자친구보다는 못하지만 이쁘지?" 아저씨가 말했다. 그녀는 마치 자식 자랑을 하듯이 말하는 아저씨를 보면서 왠지 기분이 좋아졌었다. 그도 기분이 좋은 듯이 웃으며 악세사리 구경을 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팔찌하나를 집어 올렸다.


 "이거 예쁘다. 너랑 잘어울릴 것 같아." 그가 말했다.


 그 팔찌는 원색의 알이 말도안되게 맘대로 뒤섞여있는 화려하고 작은 팔찌였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핑크색 등등 화려한 색들이 조금도 채도를 낮추지 않은 채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색의 조합 치고는 이상해보이지 않고 귀여운 맛도 있었지만, 왠지 이건 너무 센스가 심하지않아? 라는 기분이라서 그녀는 그를 보며 웃었다.


 "이게 맘에들어?" 그녀가 말했다.


 "응, 나 이게 너무 맘에든다. 너 차고 다녀, 사줄게."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아저씨에게 가격을 여쭙고 대뜸 사버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차 봐."


 그녀는 조금 황당했지만 팔찌도, 그런 팔찌를 주는 그도, 싫지 않았던 터라 거부하지 않고 받아서 손목에 차보았다. 차는 편이 더 매력있는 팔찌였다. 그냥 보는 것보다 손목과 함께 어울린 모습이 훨씬 예뻤다. 아니, 손목에 차고있어야지만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팔찌가 맘에 들었다.


 그녀는 그 날 이후로 매일같이 그 팔찌를 차고 다녔다. 친구들도 다들 좋아했다. 처음엔 그게 뭐냐며 유치원생도 아니고 애같이 그게 뭐냐며 놀리는 투로 얘기했지만 보면 볼 수록 다들 좋아했다. 아무래도 인사동의 그 아저씨가 직접 만들어 파시는 것 같았다. 특별한 물건처럼 느껴져서 더더욱 좋았다. 정장을 입을 때도 캐쥬얼을 입을 때도 언제나 차고 다녔고, 또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 좋은 줄도 모르고 차고다녔다. 외출 할때면 어김없이 팔찌를 찾았었다. 그건 마치 바지를 입을 때 벨트를 차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맘에 쏙 들게 예뻤다. 하지만 그들의 연애는 그렇게 계속 예쁘지 않았다.


 언제나 주는 것에만 익숙했던 그였던 터라 받는 것이 어색해서였을까. 시간이 흘러 그들의 사랑이 발효되고 나니, 그녀는 맘껏 자신의 사랑을 줄 수 없는 그와의 연애가 지루했다. 잘못 발효되었는지 시작부터 어긋났던것인지 모른다. 그들의 사랑은 빛도 바래고 냄새도 바래버리고 부패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녀는 더이상 그에게서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함께 있을 때보다 예전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는 편이 더 행복했다. 그와 함께 있는 현재 시간은 의미를 잃고 가치도 퇴색 되어버렸다. 그는 과거의 존재이고 그녀 자신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고 그와 그녀의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시간의 벽이 느껴졌다. 더이상 다가갈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더이상 가까워지고싶다는 생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별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그때도 종로였다. 해가 쨍쨍 내리쬐던 대낮,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어떻게 말할까 언제 말할까,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계속 고민하고있던 그녀였지만, 막상 그가 나타나자마자 그런 고민들이 전부 지워지고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담도 없고 슬프지도 않고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이별은 이별일 뿐. 


 "우리, 이제 그만 만나."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거짓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이, 장난기를 발견하려는 듯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진심이고 진실이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치던 그는 이내 다시 이전처럼 해맑은 미소를ㅡ마지막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와 악수했다. 마치 수고했다는 듯이 힘있게 악수를 했다.


 "잘 지내. 걱정 안할게." 그가 시원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내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등을 돌려 가버렸다. 그녀는 그런 그의 흔적을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시원했다. 기묘하게 상쾌했다. 마치 원래 없었던 인연이었던 것처럼. 그와 함께했었던 기억은 분명히 뚜렷한데 방금까지 그와 그녀가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누군가 나타나서 아니라고 말해준다면 정말 그와의 연애가 처음부터 부정될 것 같았다. 그를 정말 사랑했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아, 저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였다. 그가 현실로 다시 나타났다. 놀란 눈으로 대답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한데. 아, 내가 정말 이런 얘기하는 사람은 아닌데. 자꾸 마음에 걸려서.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음, 이걸 어떻게 하지."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뭔데?" 그녀는 마음을 추스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 팔찌있잖아. 내가 저번에 인사동에서 사준거. 지금 네가 차고있는 그거. 사실 그거 내가 마음에 들었었거든. 네 팔목에 있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을 정도로. 근데 이젠 그 팔찌를 못본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아쉬워서. 있잖아... 그..."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달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웃기면서도 황당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상상조차 못했다. 간까지 꺼내줄 것만같던 사람이 스스로 뭔가를 달라고 요구하다니. 그것도 자신이 준 것을 도로 돌려달라고까지 하다니, 놀라웠다. 어쩐지 현실감이 더더욱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별을 이야기했을 때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그녀도 그의 눈에서 거짓이나 장난기를 찾아보려했지만 역시나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말없이 팔에서 팔찌를 빼내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수줍고 미안한듯이 팔찌를 받아서 고맙다고 말하고 멀어져갔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와의 이별은 그녀에게 별로 큰 상심을 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먼저 마음의 정리를 한 탓도 있을테지만 왠지 자꾸만 시간의 벽 건너편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별로 크게 상처받거나 우울해할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기억이 아릿하게 남아 현재를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가 없다는 사실이 어색하지도 않고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자꾸 생각나게 되는 건 그 팔찌였다. 그가 다시 가져갔던 팔찌는 이별 이후 계속 생각이 났다. 손목이 허전해서라고 합리화했지만 비단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외출을 나갈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자꾸 비어있는 손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시계를 차보거나 다른 팔찌를 차보았지만 늘 뭔가 부족했다. 그 팔찌가 아니면 팔목에 어울릴만한 건 더 이상 없는 것 같았다. 그게 참 쓸쓸했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하듯, 그런 팔찌에 대한 애착도 시간이 지나고나니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 그녀가 다시 그를 떠올렸다. 이게 얼마만일까. 그나 팔찌는 둘째치고 그에 대한 빛깔 고운 추억들까지도 꺼내지 않은지도 꽤 된 것 같은데, 불현듯 그에 대한 느낌이 이렇게 현실감있게 다가오다니,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인사동을 처음 온 것도 아니다.  오늘이 그 시절의 기억과 맥을 잇는 특별한 날도 아닌데 왜 하필 지금 이렇게 불현듯 그가 강하게 느껴질까. 마치 이곳에 그가 있는 것처럼.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인사동, 바로 이 곳이 그처럼 느껴졌다. 현실이 머무는 공간 자체가 그 사람 같았다. 그녀 자신은 그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과거가 그녀의 현실을 앗아가버렸다. 그녀는 가슴이 아파왔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통증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왜그래. 괜찮아?" 그녀 옆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맞다. 그녀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와의 이별 후에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쯤 되었을까. 횟수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그녀 옆에는 새로운 인연이 있다. 이제는 그에 대한 기억을 하는 것이 새로운 사람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해줄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야. 갑자기 답답해서. 괜찮아, 지금은." 그녀가 말했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녀처럼 그도 지금 새로운 사람과 있을 것이다. 혹은 새로운 사람과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이다. 왜 갑자기 그에대한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그런 기억조차 다시 다듬어서 추억 속에 밀어넣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한다. 기억이 아무리 현실감을 갖고 현재로 뛰쳐나와도 그건 과거의 사건일 뿐이다. 현재의 일이 될 수 없다. 과거가 노력한다 한들 현재의 그녀를 과거로 돌이킬 수는 없다. 그녀조차 변해버린 시점에서 변함없이 과거를 원한다는 것은 과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에 충실하고 지금 있는 새사람과의 사랑에 행복해야한다.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것이고 그녀가 추구해야하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야 한다. 가슴에 품어져있는 과거를 끄집어내서는 안된다. 과거는 언제나 현재의 뒷켠에서 눈치를 보며 얌전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도 그런 모습으로 그녀의 등 뒤에서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처럼 현실감있는 그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미래를 위한 계단을 위해 살아가자,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신의 옆에 서있는 남자에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손을 꼭잡고 몸을 세워 걸었다.


 "아가씨, 여기와서 팔찌 좀 보고가요." 누군가가 말했다.


 목소리가 왠지 익숙해 돌아보았더니 그때 그와 그 팔찌를 샀던 그 노점상 아저씨였다. 그녀는 오늘따라 무슨 일이 있나 싶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그 노점상 앞에 섰다. 여전히 어설프고 허름하고 인간미 넘치는 분위기의 악세사리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저씨를 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여서 더욱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르면 인상 좋은 미소의 전문가가 될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생각이 우스워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더이상 새빨간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다. 짧은 챙에 손때가 거뭇하게 묻어있는 색바랜 회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의 진지하리만치 새빨갛던 모자가 생각나서 그리움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새빨갛지 않은 빛바랜 모자가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 기억이 바래버린 것처럼 아저씨의 모자색도 바래버린 것만 같았다. 단지 그리움때문이었을까, 그녀는 가판대로 다가가서 남자친구를 옆에 세워두고 이것저것 골라보기 시작했다.


 "어, 이거." 그녀가 말했다.


 "왜? 그게 맘에들어?" 남자가 말했다.


 그녀는 팔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원색의 알들이 정신없이 뒤죽박죽 나열되어있는 화려해보이는 팔찌. 어디에도 어울릴 것 같지않은 이상하게 생긴 팔찌. 그 팔찌는 그때의 그 팔찌였다. 당연히 그가 갖고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팔찌가 다시 노점상아저씨의 행상 위에 놓여있었다. 난색과 반색이 수도없이 교차하며 그녀의 얼굴을 스쳐갔다. 그와의 기억들. 그때의 추억들을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자신은 그와의 추억때문에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발목잡혀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당연히 그가 그녀 자신을 생각하며 그 팔찌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그녀와의 추억이 진하게 묻어있는 팔찌를 도로 제자리에 돌려놓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애초부터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 자신에게 팔찌를 돌려받았던 것일까. 그런 생각에 그녀는 왠지 질투심이 일었다. 자기만 제자리에 있었던 것 같았다. 잊은 줄만 알았던 과거에 묶여있었던 것은 그녀 혼자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정봐줄만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자기가 너무 과소평가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기억 속에 나타났다. 언제나 주기만했던 그. 그동안 제자리에만 머물며 기억을 추억 속에 담아서 간직하기만 하면 다 되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그녀에게 조언이라도 해주려했던 것일까.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괜찮다고 말하고 괜찮은 줄 알았던 그녀가 아직도 그에대한 추억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사랑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자기는 이미 그녀를 전부 버렸다고, 작은 기억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그저 그곳에 제자리에 두고 왔다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눈 앞에 있는 팔찌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더이상 반가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추억 속에 젖어들지도 않았다. 팔목에 한번 차보았지만, 예전만큼 매력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것은 그저 멋없는 팔찌일 뿐이다. 그녀는 변했다. 그리고ㅡ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ㅡ역시 그도 변했다. 팔찌도 변하고, 그녀의 손목도 변했다. 그녀는 이제 웃을 수 있다.


 "이거, 자기가 찰래?" 그녀가 남자에게 팔찌를 내밀며 말했다.


 "아니, 싫어." 남자가 말했다.


 "왜?"


 "촌스럽잖아." 남자가 말했다.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찌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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