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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사람 Nov 16. 2020

할아버지 앉으셔도 돼요.

어른에게 배울 것은 여전히 남아있다.

시내로 출장을 갔다가 퇴근하는 길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중간에 내려서 버스로 환승을 했고 퇴근시간의 버스는 역시 걸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유독 집 앞까지 가는 버스는 늘 만원이다. 걸어가면 (4시간 거리로) 내일 출근을 못할 거 같아 버스를 타긴 했지만 만원 버스는 언제나 불편하다. 반쯤 비어있는 버스를 타는 것은 좋아하지만.


만원 버스는 나라는 사람이 그냥 서있을 공간조차 없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한 생각은 버스 바깥의 세상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대부분 별다른 선택지 없이 그렇게 살아가지만. 아니면 5분 돌아가더라도 그나마 한가한 노선을 찾아서 남들은 직선으로 가는 길을 늘 곡선으로 가곤 했다. 괜한 유치한 패배감에.


버스가 달리고 한정거장이 지나고 할아버지가 타셨는데 임산부석에 앉아계시던 아저씨가 일어나셔서 자리를 양보해드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자리를 거절하셨다.


“내가 탈 자리가 아니여.”


순간 보이지 않는 파동이 일었다. 버스는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고 자리는 비어있었다. 뒷자리 임산부석에 타셨던 아주머님도 곧 일어나셨고 그 자리는 다른 아주머님의 차지가 되었다. 히지만 할아버지를 위해 비워졌던 임산부석은 만원 버스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비워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임산부석에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앉아계신 것은 별로 보지 못했다. 노약 좌석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요즘엔 노약 좌석도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상실하긴 했으니 말이다. 마음이 노약자인 것도 노약자로 봐야 한다면 마음이 약한 젊은 노약자들이 노약 좌석을 점령하기도 한다. 이제 할아버지들은 더 이상 비켜달라는 이야기도 하질 않으신다.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좀 어정쩡한 포지션에 있는 게 아닐까.


노약자. 임산부. 장애인. 정서적 노약자도. 다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보호를 받아야하만 하고 보호를 받고싶은 사람은 늘어가는데 정작 서로를 외면하는 누구도 보호해줄 곳은 없는 안타까운 우리.


할아버지는 중력을 오묘하게 역행하는 연세가 되셔서 다른 사람에 비해 크게 흔들렸고 결국 한 아저씨께서 모시다시피 하여 임산부석에 마지못해 앉으셨다. 다행히도 할아버지가 내리실 때까지 어떤 임산부도 버스에 타지 않았다. 그 일로 종종 잊고 지내기도 했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명절에만 뵐 수 있던 멀리 있는 시골집에서 늘 인자하게 손주들을 기다려주시던 할아버지가. 이젠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어버린 시골이. 할아버지와 많은 추억이 있지는 않지만 죽음 앞에서는 막상 너무나 슬펐는데 이곳에 남아 기다림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거라는 불신이 커진 걸까. 그럼에도 오늘 일을 계기로 마음속에 자그마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면 완벽한 거짓말은 아닐 거라고 다시 스스로를 속이기로 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잘 살아보아야겠다고.





미래는 어떤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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