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웨스트우드를 기억하며.
옷장만큼 나를 대변해주는 것이 또 있을까. 옷은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 외에도 나를 드러내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의미를 가진다.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 옷은 그 사람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에 한편으론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의 말처럼 옷은 그 자체로 외모나 학벌 또는 직업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꼭 명품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개성과 고유한 이미지를 옷을 통해 어느 정도는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옷장을 정리하다가 안 입는 옷을 잘 버리지 않고 묵혀둔 과거의 나를 발견하고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러니 발전이 없을 수밖에. 일 년 동안 입지 않은 옷은 그 후에는 입을 일이 거의 없으므로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중고마켓에 거래를 하기도 한다지만 그 또한 보통의 노력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세를 확인하고 시세보다 싸게 내놓아도 반응이 없으면 가격을 또 내리고 귀차니즘인 나에겐 흥미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실컷 가격 흥정까지 해놓고는 입금하지 않거나 잠수를 타는 사람들을 몇 번 경험한 뒤에는 그냥 의류보관함으로 보내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TMI지만 주변에 중고마켓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보니 주로 육아용품이나 레어템(?) 같은 것들이 거래가 용이하다고는 했다.)
한때 SPA 브랜드의 열풍이 몰아치고 중국시장에서 들여온 저렴한 옷들이 늘어나면서 패션시장은 사양산업이 되어버렸다. 백화점을 가도 고가의 옷과 저가의 옷만 있을 뿐 적당히 멋스럽고 우아하며 그에 걸맞은 가격을 가진 옷들을 찾는 것은 이제 예전보다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마음에 드는 옷을 찾기 위해 제법 오랜 시간을 인터넷 서핑으로 시간을 들여 배송을 받고 나서 동대문시장에서 사입한 뒤 라벨갈이 한 옷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시장 제품의 퀄리티 때문이 (중국산이 아닌 국내 생산 의류는 퀄리티가 높다.) 아니라 브랜드가 그 고유성을 잃어간다는 사실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찾고 고르는 일이 마음처럼 몸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쇼핑하는 일이 어려웠다. 가격이 부담이긴 해도 디자이너의 고민과 철학이 담긴 브랜드 고유의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에 할인하는 제품 중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고 골라 사기도 했다. 하지만 백 퍼센트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옷들은 일 년을 넘겨 입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명언을 접하게 되었다.
Buy less,
Choose well.
Make it last.
- Vivienne Westwood -
기존의 보수적인 질서를 탈피하려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언제나 패션에 담으려 노력했던 그녀는 영국 패션계에 고유의 타탄체크 등으로 큰 획을 그었다. 그리고 패션뿐만이 아닌 그녀의 인생 전체에 대한 특별하고 특별한 가치관은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었다.
남들처럼 유행을 빠르게도 아닌 어설프고 뒤늦게 허겁지겁 따라가던 나는 그 이후로 소비 자세의 윤리적 태도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다. 옷을 잘 사는 일은 결국에는 쓰레기를 줄이고 환경을 생각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말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옷을 입자라고 생각을 바꾼 뒤에는 더 이상 세일을 한다고 또는 단순히 가격이 저렴해서 구매하는 일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트렌드보다는 대신에 최소 5년 이상 입을 수 있는 퀄리티인지와 색상, 패턴, 질감 등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최신 경향을 조금이라도 따라가고자 하던 미련스러운 옷장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유행하는 패션들은 한 가지 아이템을 사면 그와 어울리는 아이템을 추가로 또 구입해야 해서 처음 살 때의 마음처럼 자주 입거나 활용도가 높지 않았다. 대신 질이 좋고 오래 입을 수 있는 클래식한 디자인들로 채워지기 시작한 지 1년. 주변 사람들에게 아주 가끔은 스타일이 변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는 일은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러프하게는 그릴 수 있을 거 같은 요즘이다. 이렇게 조금씩 나 같은 나를 찾아가는 오늘이 뭉쳐지면 내일의 더 괜찮은 내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