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사람 Sep 06. 2021

오직 두 사람, 김영하

4월의 날씨에게.

책의 첫 장에는 아내 은수를 위해라고 적혀있다. 알고 보니 작가님도 엄청 다정하신 분이었다. 다정하지 않고서는 작가가 될 수 없어. 소설가들은 모두 전부다 하나같이 다정다감한 게 아닐까. 다정함은 언제나 결국에는 승리를 가져다주는 거라는 믿음이 생겨버렸다.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집은 사람의 어두운 면을 꿰뚫어 보는 느낌이 들어 왠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거부할 수 없이 끌려가게 되는 것이 또한 운명 같다.


오직 두 사람, 김영하


이것은 아내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아내이며 아내였던 사람들. 누군가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 아내 역할을 대신하는 딸, 가정폭력의 중심에 놓인 아내, 아이를 잃어버리고 조현병에 걸린 아내, 이혼한 전 와이프의 연애, 이 세상의 어딘가에는 있을 게 분명한 미래의 와이프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느껴져서 미묘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작가들의 뛰어난 공감능력은 소설 안에서 언제나 기지를 발휘한다. 책을 읽다가 작가님이 아내가 되어본 적이 있는 게 아닌지 전생에 누군가의 아내였던 게 아닐지 쓸데없는 망상에 빠진다. 책 안에서 또 책을 상상하는 일을 안 되는 것들을 되게 만드는 힘은 열정적이며 그와 동시에 파괴적이기도 한 작가님의 경험과 환상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괜찮은 문장들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믿는다.


단편소설의 매력은 각각의 주인공들의 일부가 오버랩되면서 레이어들이 겹쳐지고 결국엔 불투명하지만 그렇기에 투명해진 우리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거 아닐까. 그가 쓴 글은 결국에 작가 자신의 일부이기에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괜히 작가님의 친숙한 지인 중에 한 명이 된 거 같아서 뿌듯해졌다. 주인공 각각에 나를 대입해보며 정답이 없는 시험지를 푸는 느낌이 들었다. 풀 때마다 매번 기어코 답이 달라지고야 마는. 그치 정답이 없는 게 인생이지 누가 잘살고 못살고는 중요해 보이긴 하지만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분명하잖아.


옥수수와 나, 김영하
위선이여, 안녕

옥수수수프를 좋아하는 나는 '옥수수와 나'에 어지간히 공감하고 말았다. 어쩌면 나도 옥수수가 아닐까. 옥수수가 아닌 척하며 살아가는 일이 쓸쓸하면서도 쓸쓸하지 않다. 일생동안 옥수수임을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다 보면 생이 끝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결코 찾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옥수수만큼 슬플 거 같은데.


슈트, 김영하
우리는 때로 어떤 옷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랑은 때로
매우 굳건하다.


우리 모두 굳건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애써 공들여 쇼핑을 한다.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서서히 쇼핑을 멈춘다. 애써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어디로든 숨어야 하기에.


신의 장난, 김영하
잠들면 안 돼요.
조금만 더 참아요.

우리의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에 나를 붙잡아줄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형체가 너무 흐릿해서 알아볼 수가 없잖아. 아직 내가 무의식의 저편에서 돌아오지 못한 걸까. 어떡해 술이 덜 깼나 봐.


신의 장난,김영하
나는 우울을 믿어.
인간은 천둥이 치고 비가
퍼붓는 궂은 날씨에는
울적하도록 진화했어.

우울에 빠진 사람들에게 날씨는 좋은 핑곗거리인 게 분명해. 그래서 나는 날씨와 사랑에 빠졌고 세상의 모든 뉴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기상캐스터는 아름답고 예쁜 거야. 사람들은 그들이 전해주는 우중충한 날씨에 당연한 듯 쉽게 반해버린다.


작가의 말까지 완벽하게 들이켜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를 반복한다. 이건 소설 탓이 아니야. 그냥 나의 정신세계에 대한 완벽하지 않은 지지 때문이라고. 하지만 오늘도 작가님의 소설들은 계속해서 적당하게 차갑고 사치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거품이 흰 눈처럼 잔뜩 쌓인 맥주를 눈앞에 데려다준다. 감동이었어요 작가님.



작가의 말, 김영하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전 11화 평범한 결혼생활, 임경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