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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사람 Oct 14. 2021

소년이 온다, 한강

수면 아래로 흐르는 그날.

한강 작가님의 장편소설은 마하 13의 속도로 먼 우주에서 온 오랜 시간 밀봉되어 있던 시집 같았다. 우주의 속도와 지구의 속력은 완전하게 다른 체감이 아닐까. 작가님의 책은 현재와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함께 있기에. 작가님의 작품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훼손시켜도 되는 걸까 커다란 의문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진심은 어딘가에는 낡고 지친 모습을 한 채로 당도할지도 모르니.





소년이 온다는 현대사에 능통한 절친님이 추천한 책이기도 하지만 2018년에 채식주의자를 먼저 읽고 나서 소년이온다를 대출했던 기록이 있는데 왜 읽지 않았다고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다. 작가님의 분신 같은 글을 읽다 보니 허파를 저릿하게 누르던 순간이 아득하게 떠올라서 읽었던 책이 맞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다시 읽어가는 동안에 물방울 같은 파편들이 눈을 무차별적으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분수대. 물이 사람을 해칠 수 있을까. 물분자의 조각 같은 글자들이 날카롭게 부서지며 장기들 사이를 헤집고 몸통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즉 솔직하게 말하자면 피하고 덮어두고만 싶었던 그날들이 물줄기를 타고 반짝거리며 청아하게 정체불명한 투명색 칼날이 되어 공중에서 우수수 쏟아진다. 어떻게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할 수 있느냐고. 정말이지 이제는 이 책을 너를 그 소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거야.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책을 읽다 보니 눈동자 위쪽으로 말간 냇물이 흐른다. 갓 맑게 흐르는 시냇물 아래에서 신중하게 조약돌 하나를 골라서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두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너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지. 너를 거슬러 천둥이 지나가고 폭풍우가 내리치며 타고 가고 늦은 오후의 긴 햇살이 몸통을 반으로 가로질렀어. 아이들은 너를 밟고 물장구를 쳤고 어른들은 너를 짓누르며 물고기를 잡았어. 너는 무심한 얼굴을 하고 계속 그곳에 있었지. 무심하고 또 무표정하게. 바람이 너의 얼굴을 그대로 통과해버렸지. 어떻게 잊을 수 있지. 왜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었을까.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다른 사람들도 똑같을까 어쩌면. 우리는 세월이 잔뜩 흐르고 덕분에 어떤 연유로 스스로에게 생채기가 나고 남모르는 피를 흘리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그날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창피하지만 수치스럽고 부끄럽지만 고백할게. 우리는 왜 이렇게도 자신만만하게 어리석은 걸까.


목숨을 가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난
단순해지고 싶었어.
아무것도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어.



절망스럽고 고귀하고 아름답게 시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문장들은 세포 하나하나를 무방비한 상태를 공격한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냐고. 우리는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책을 덮고 나면 10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발끝 만을 보고 땅속으로 뒤꿈치를 박아 넣듯이 걸어갔다. 누군가의 눈동자와 표정들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또 가끔은 기쁘고 종종 미소가 살짝 피어오르기도 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고통이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꼭꼭 기억해야겠다. 잊어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식 속에 간직하는 일이 전부라고 해도 그래야만 하는 일도 있다는 걸.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조용한 시냇물은 어느새 길게 침묵하는 폭포가 되었다. 곧이어 몸 전체가 타공판이 되었다. 총알은 구멍을 교묘하게 관통했고 우리는 조금도 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상처 받을 자격이 없었다. 죄 없는 누군가의 처연하게 올곧은 되돌릴 수 없는 희생으로 지금에 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단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영원한 퇴보인 지금이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유리창에 낙하하는 햇살만큼 얇게 우리를 투과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해 긴 터널의 초입에 왼발을 먼저 들이민다. 대부분이 해답을 찾아내어 굴의 반대편 끄트머리에서 출구를 향해 가로질러 나올 때 그제서야 과거에서 온 동트기 직전의 캄캄하고 음침한 어딘가를 헤매게 될 의연하게 의미 있는 질문들 사이로. 우리가 음음적막한 어둠을 빠져나올 수 있을지는 끝내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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