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에 의한.
죽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열심인 다자키 쓰쿠루.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난해하고 구조적인 데다 깊은 우물 같은 느낌을 역시 간직하고 있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댁에 있던 우물은 자박자박한 물이 가득하게 있었고 고요하지만 살아있는 생물처럼 보여서 자꾸만 그 주위로 누군가를 끌어들였다. 섬찟하지만 한편 들춰내고 싶은 이중적인 감정들로 우물 안쪽에 얼굴을 들이밀고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물의 전령이 미지의 저편에서 말을 거는 듯했으니까.
극심한 상실을 경험하기 이전 예전의 다자키 그는 누군가에게 색채로 표현할 수 없는 색을 가진 인간으로 보여지고 싶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가 존재하는 지구에 대한 의심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래전 어떤 계기로 그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일련의 사건들은 그를 뚜렷하게 티 나지 않게 또 보이지 않게 기존의 모습에서 다양하게 각도를 뒤집고 바꿔놓았다. 우리는 불균형으로 인하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조각과 파편들로 깨어졌다가 가까스로 다시 조립된 섬세하고 쓸모없는 프라모델 같은 물질처럼 예전과 똑같지만 한편으로는 절대로 같을 수 없게 되어버린 물체로 실존하고 그건 아마 그 이후의 다자키와 물리적으로 꽤 비슷한 부분 같았다.
과거의 시간이 지금 여기에
흐르는 현실의 시간으로
소리도 없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미 살짝 뒤틀려있는 세계는 아주 미미한 외력에 의해서도 반대로 커다란 내부적인 힘이 작용할 때에도 유의미하게 바뀔 수 있다. 그 변화는 불지불식 간에 일어나거나 아주 서서히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될 수도 있었다. 다자키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 놓여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들의 사고체계는 현실 이상의 것으로 무한하게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복성은 늘 그랬듯이
그의 마음을 빼앗아 적어도
시간에 대한 의식은 마비시켜 주었다.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는 우리가 사유하는 지금의 궤멸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걸까라는 의문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친밀한 것들 과는 단절되었지만 영속적이고 철학적인 세상이 있다면 그곳을 향해 내달려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가고 싶지 않아도 갈 수밖에 없는 통로를 향한 다자키의 발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고 경쾌하거나 달리 처연하지도 않았다. 묵직하고 묵묵하게 이어질 뿐인 보편적이며 가장 보통의 모습을 하고 흘러가는 시간들과 오히려 비슷했다.
결국 다자키가 떠난 순례의 길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그 자신을 찾기 위한 과거로의 여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현실을 단정하고 여유롭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때론 과거를 부유하며 남겨진 조각들을 모아야 하는 순간들이 있고 당시에는 미세한 오해가 훗날 돌이킬 수 없는 폭풍우가 되어있기도 하기에 그는 다소 번거롭지만 필수 불가결한 여행을 떠나야만 했다. 여행과 휴가는 숨겨진 우리들을 신중하게 탐색하도록 도와주고 우리는 어색하고 신비롭고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과거를 재정비하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기 위해 순례하는 일을 반복하며 생을 산책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다자키 쓰쿠루는 색채가 없지만 그 때문에 어떤 색채라도 담아내는 일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노르웨이의 숲 즉 상실의 시대가 냉철하고 무관심하고 무심한 공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소설이었다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조용하고 사려 깊은 다감한 포옹을 가둬두고 있었다. 작가님은 독자들이 자기 앞에 놓인 벽을 통과할 자유가 있다고 느끼길 바라며 젊은이들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고 들었다. 우리는 늘 책을 통해 위로받고 빈 틈을 적절하게 메우기 위해 노력하며 계절을 보내기에 언젠가는 쓸쓸함에 사로잡히게 되면 백야가 있고 겨울이 긴 핀란드에 꼭 가봐야 할 것만 같다. 나쁜 난쟁이들에게 잡혀가지 않도록 절대적으로 주의하면서.
지금, 당신은
어느 역에 서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