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할 때

레이오프도, 사업 정리도, 은퇴도, 다 퇴사입니다

"퇴사했어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묻는다.

"어디로 가요?"


마치 퇴사는 A회사에서 B회사로 가는 중간 과정인 것처럼. 마치 내가 선택해서 떠나는 것처럼. 마치 당연히 다음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근데 요새는 그게 아니지 않나.


퇴사의 스펙트럼

내가 생각하는 퇴사는 이렇다.

퇴사 = 지금 하던 일을 그만두는 모든 순간

여기엔 다 포함된다:

내가 선택해서 사표 쓰는 것

회사가 선택한 레이오프

운영하던 사업을 접는 것

프리랜서로 주 클라이언트를 잃는 것

계약직 기간이 끝나는 것


공통점은 하나다. 어제까지 하던 일을 오늘은 안 한다는 것.

왜 이걸 다 똑같이 "퇴사"로 봐야 하냐고? 왜냐면 그 이후에 해야 하는 일들이 똑같거든.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똑같이 힘들다

나는 두 가지를 다 겪어봤다.

내가 선택해서 회사를 나올 때도 있었고, 사업/회사를 접을 때도 있었고, 레이오프 통보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근데 신기한 게 뭐냐면, 어떤 방식으로 떠나든 겪는 감정은 비슷하더라.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상실감

뒤처지는 것 같은 조급함

다음에 뭘 해야 할지 막막함

이력서에 공백이 생긴다는 두려움


자발적으로 떠난다고 이게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가 선택한 거니까 잘해야 해"라는 압박이 더 클 수도 있다.

비자발적으로 떠났다고 더 힘든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어쩔 수 없었으니까"라는 면죄부가 마음을 좀 덜어주기도 한다.

중요한 건 떠난 방식이 아니라, 떠난 후에 뭘 하느냐다.


사업을 접는 것도 퇴사다

특히 사업을 접는 건 퇴사로 안 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게 제일 전형적인 퇴사라고 본다.

내가 6년 운영한 회사를 접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다음엔 뭐 할 거예요?"


아니, 나 지금 회사 접었는데요. 나 지금 퇴사한 사람이에요.

근데 그 질문 속에는 이런 가정이 깔려있더라. "창업가는 계속 창업을 하는 사람이니까 다음 회사를 준비하겠지."


아니거든. 나도 그냥 퇴사한 사람이거든.

명함도 없고, 소속도 없고, 다음에 뭘 할지 모르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오늘 뭐 하지?" 생각하는 사람.

회사원이 회사 나온 것과 다를 게 없다.


퇴사 후 선택지는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건, 퇴사 후에 꼭 비슷한 일을 다시 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개발자였다가 요가 강사가 될 수도 있고

PM이었다가 작가가 될 수도 있고

컨설턴트였다가 카페를 열 수도 있고

아예 한동안 아무 일도 안 할 수도 있다


마지막 거, "아무 일도 안 하기"를 사람들은 잘 안 쳐주더라. 마치 그건 선택지가 아닌 것처럼.


근데 은퇴도 선택지다. 50대에 은퇴하든, 40대에 은퇴하든, 심지어 30대에 한시적으로 은퇴하든.

"나는 당분간 일 안 할 거야"도 완전히 정당한 선택이다.


퇴사 후에는 뭘 할지는 활짝 열려있다. 전혀 다른 걸 해도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각자 개인의 사정에 달려있을 뿐.


퇴사 전후에 생각해야 할 것들

그래서 나는 퇴사를 이렇게 본다.

퇴사 = 하나의 사이클이 끝나고 다음이 시작되기 전의 전환 구간


이 전환 구간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건 세 가지다.


1. Where am I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떠나기 전, 혹은 떠난 직후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

내가 지금까지 뭘 해왔나

내가 뭘 잘하나

내가 뭘 좋아하나

내가 뭘 싫어하나


이게 명확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근데 대부분은 이 단계를 건너뛴다. "빨리 다음 직장 찾아야지" 하면서.


2. Where do I want to go (나는 어디로 가고 싶나)

지금 위치를 확인했으면, 이제 방향을 정할 차례.

다음엔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싶나

누구와 일하고 싶나

아니면 한동안 일을 안 하고 싶나

어떤 삶을 살고 싶나


여기서 중요한 건,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가설을 세우는 거다. "이거면 괜찮을 것 같은데?"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 가설이 "당분간 아무 일도 안 한다"여도 괜찮다. 그것도 하나의 방향이다.


3. How to get there (어떻게 거기까지 갈까)

방향이 정해졌으면, 이제 실행 계획.

뭘 배워야 하나

누구를 만나야 하나

어떤 경험을 쌓아야 하나

언제까지 뭘 할까


여기서도 완벽한 계획은 필요 없다. 일단 첫 스텝만 명확하면 된다.

그리고 만약 방향이 "은퇴" 혹은 "쉼"이라면? 그것도 계획이 필요하다. 어떻게 쉴 건지, 무엇을 하며 쉴 건지, 언제까지 쉴 건지.


프레임워크가 필요한 이유

왜 이런 프레임워크가 필요하냐고?

퇴사는 앞으로 여러 번 겪게 될 거니까.

한 번만 잘 넘기면 되는 게 아니다. 40년 커리어 동안 5번, 10번 겪게 될 거다.

그럴 때마다 허둥대지 않으려면, 내가 쓸 수 있는 프레임워크가 있어야 한다.


"아, 나 지금 퇴사했네. 그럼 일단 Where am I부터 시작하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퇴사는 위기가 아니라 그냥 다음 사이클로 넘어가는 과정이 된다.


퇴사를 재정의하자

퇴사는:

A회사에서 B회사로 가는 중간 과정이 아니다

실패의 증거도 아니다

부끄러운 공백도 아니다

반드시 다음 일을 찾아야 하는 시간도 아니다


퇴사는 하나의 사이클을 마무리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전환의 시간이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회사를 나오든 사업을 접든, 계약이 끝나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똑같다.


Where am I → Where do I want to go → How to get there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하면서, 천천히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 사바티컬.


당신이 지금 어떤 방식으로든 퇴사를 앞두고 있거나, 이미 퇴사했거나, 혹은 언젠가 퇴사하게 될 거라면.

이 프레임워크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퇴사 - 나를 지키며 잘 도망치는 법> 매거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글이 재미있으시다면 팔로우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