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도, 구직자도, 백수도 휴가가 필요합니다

쉬는 게 게으름이 아닌 이유

"지금 뭐 해요?"

"쉬고 있어요."

"그럼 시간 많이 남겠네요!"

아니거든요.


일 안 하면 시간이 남는다는 착각

퇴사하고 나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출근도 안 하고, 회의도 없고, 업무도 없으니 시간이 엄청 남을 거라고.

근데 막상 퇴사하고 나면 시간이 남지 않는다.

이력서 쓰고 고치고 또 고치고

구인 공고 찾아보고 지원하고

네트워킹 미팅 잡고 만나고

포트폴리오 정리하고

새로운 거 배우고

다음에 뭘 할지 고민하고


거기다 퇴사 후 특유의 조급함이 있다. "빨리 뭐라도 해야 해"라는 압박감. "다들 일하는데 나만 안 하면 뒤처진다"는 불안감.


그래서 오히려 더 못 쉰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정신없이 바쁘게 산다. 주말도 없고, 퇴근도 없고, 멈출 틈도 없이.


휴가가 필요한 이유

그래서 퇴사자도, 구직자도, 백수도, 비트윈 잡스여도 휴가가 필요하다.


1. 일상에서 벗어나야 생각이 바뀐다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루틴으로 살면, 생각도 똑같이 돈다. 매일 침대에서 노트북 켜고, 링크드인 보고, 이력서 고치고, 또 고치고.

이러다 보면 생각이 좁아진다. "다음 직장 어디로 갈까"만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근데 다른 환경에 나를 놓으면? 생각의 틀이 바뀐다.

바다를 보면 "내가 왜 이렇게 조급했지?" 생각이 들고, 산을 걸으면 "이런 삶도 괜찮을 것 같은데" 생각도 든다. 낯선 도시를 걷다가 "아 나 이런 분야도 재미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도 불쑥 튀어나온다.


환경이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이건 논리가 아니라 물리적인 현상이다.


2. 쉬어야 다음이 보인다

뇌가 계속 긴장 상태에 있으면 새로운 생각이 안 난다. 생존 모드에 빠져서 당장 눈앞의 것만 본다.

"다음 직장", "이번 달 생활비", "내일 면접" 이런 것만 보인다.


근데 진짜로 쉬면? 뇌가 여유를 찾는다. 그러면 좀 더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뭐지?", "5년 후엔 뭘 하고 있을까?", "이번 기회에 다른 걸 해볼까?" 이런 질문들이 떠오른다.


쉬는 동안 뇌는 놀지 않는다. 오히려 재정렬을 한다.

뇌과학자들이 말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가 바로 이거다. 아무것도 안 할 때 뇌가 더 활발하게 돌아간다. 정보를 정리하고, 연결하고, 통찰을 만든다.

그러니까 휴가는 게으름이 아니라 뇌가 일하는 시간이다.


3. 소진되면 아무것도 못 한다

퇴사 후의 조급함으로 계속 달리다 보면 소진된다. 번아웃이 온다.


그러면 이력서도 안 써지고, 면접도 망치고, 사람 만나는 것도 귀찮아지고, 결국 아무것도 못 한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제대로 쉬는 게 낫다.


일주일이든, 보름이든, 한 달이든. 완전히 손 놓고 쉬면, 다시 돌아왔을 때 에너지가 생긴다.

"아 이제 다시 시작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저도 휴가 왔습니다

저는 지금 프레지던트 위크 1주 방학이어서 가족들과 함께 여행 와 있어요.

본래 사부작 거리던 거 최근에 진도가 영 안 나가길래 불안해서 하려고 들고 왔는데 그냥 쉬고 싶네요.

랩탑은 가방 안에 있고, 저는 지금 침대에 누워서 이 글만 쓰고 있습니다. 내일 할 일? 모르겠어요. 그냥 천천히 일어나서 천천히 밥 먹고 천천히 돌아다닐 것 같아요.


못 쉬는 병

그러고 보면 못 쉬는 병 걸린 지 오래된 것 같아요.

미국 대기업,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 거치면서 랩탑 안 들고 개인 여행 가본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20+년??) 이제 생각도 안 나네요.


항상 랩탑 챙기고, 호텔에서도 일 좀 하고, 비행기에서도 메일 확인하고.

"나는 워커홀릭이야", "일이 좋아서 하는 거야" 이렇게 합리화했는데, 사실은 그냥 못 쉬는 거였던 것 같아요.

안 쉬는 게 미덕인 줄 알았어요. 계속 생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렇게 살다 보니 소진되더라고요. 번아웃 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쉬기로 했습니다.


일은 집에 돌아간 내가 할 거예요

지금 이 휴가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불안하긴 해요. "이거 하고 저거 해야 하는데" 생각도 들어요. 근데 그 생각들을 그냥 지나가게 두렵니다.


일은 집에 돌아간 내가 몰아서 할 거예요.

지금 이 순간, 여기서는 그냥 쉴 겁니다.


당신도 휴가 가세요

퇴사했어도, 구직 중이어도, between jobs여도.

휴가 가세요.


멀리 갈 필요 없어요. 근교라도, 하루 여행이라도, 집에서 도시 반대쪽에 있는 까페라도.

일상과 다른 환경에 나를 놓아보세요. 노트북 안 들고, 이력서 생각 안 하고, 그냥 쉬어보세요.


그게 게으름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에요.

뇌가 재정렬하는 시간이고, 에너지를 회복하는 시간이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시간이에요.


그러니까 죄책감 갖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그냥 쉬세요.

일은 돌아가서 하면 됩니다.



<퇴사 - 나를 지키며 잘 도망치는 법> 매거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글이 재미있으시다면 팔로우 해주세요.


Photo by Kate Stone Mathe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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