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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런던의 피아니스트>

함께 걷는 그림자

by 그림자

2008년 여름, 출장을 위해 영국 런던을 방문했다. 당시의 출장 일정은 장거리 비행을 질색하는 나의 체력을 고려하여 타이트하게 잡지 않았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출장지의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나름의 시간이 주어졌다.


내가 그를 마주친 건 정보 수집과 점검을 위해 사우스 켄싱턴이라 불리는 런던 서남부 지역을 방문했을 때였다. 켄싱턴은 잔잔하고 깨끗하며 고급스러운 동네란 느낌을 주었다. 서두르는 느낌을 주는 사람도 소리치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화이트와 브라운톤의 정갈한 느낌을 주는 낮은 주택 건물들이 골목마다 나름의 규칙을 갖고 정렬되어 있었다. 점심을 먹기 전, 오전을 보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곳이었다.


나는 골목길을 한참 산책하면서 그곳의 한적한 느낌을 만끽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굵은 물방울이 툭하고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잔뜩 찌푸린 먹구름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질 기세였다. 비를 피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커피숍에 들어갔다. 가림막이 있는 야외 테라스를 가진 커피숍이었다.


따뜻한 커피를 들고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 빗줄기는 처음보다 거세졌다. 우산을 챙기지 않고 나온 터라 비가 그칠 때까지는 꼼짝없이 커피숍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에는 여분의 시간을 갖은 즐거움으로 채울 스마트폰이 없었다. 매우 단순한 전화 기능에만 충실한 출장지 전용 노키아폰만 갖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그저 멍하니 비 오는 거리의 모습을 보며 소나기가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It’s a nice rainy day, isn’t it?”


꽤나 큰 목소리에 놀란 나는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았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그는 한 30대 후반 즈음으로 보이는 진한 인상의 백인이었다. 그의 어깨까지 내려오는 곱슬기 있는 갈색머리와 스트라이프 무늬의 블루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그저 대충 나왔다고,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자연스러운 멋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비 오는 좋은 날이지 않니?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제야 그는 해맑게 웃으며 샐러드를 먹었다. 그러면서 이 카페는 굉장히 음식이 맛있다며 칭찬을 곁들였다. 그는 말을 하며 중간중간 나의 동의를 구했다. 어느새 나는 그와 대화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커피는 아직 따뜻했고, 비는 여전히 내리는 중이었다.

샐러드 접시를 비우자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나에게 종이가 없는지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는 냅킨을 피고는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나에게 냅킨을 내밀었다.


‘four seasons in one day!’


나는 무슨 뜻인지 물었다. 그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런던은 언제나 흐리고 비가 온다면서 사계절이 똑같은 비 오는 하루라고 설명했다. 나는 그의 말에 매우 즐거워하며 동의했다. 비가 내리는 날 알게 되는 굉장히 유익한 이야기였다. 나의 격한 반응에 격양된 그는 무언가를 더 알려주고 싶어 했다. 갑자기 그는 옆 건물로 나를 초대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초대에 나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을 설명했다. 그는 런던과 파리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를 따라간 곳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도망가려고 했는데 정말로 그가 피아니스트였다니!


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강한 인상과 다르게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피아노 연주는 굉장히 부드러웠다. 연주한 곡명이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당시의 느낌으론 따뜻하고 좋았다는 여운이 기억난다. 이방인인 내가 낯선 곳의 낯선 이의 호의로 받기에는 정말 예기치 않은 놀라운 선물이었다. 그는 오늘 같은 날은 너무나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면서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이 생겨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번 들은 음악은 모두 연주할 수 있다며 좋아하는 곡을 허밍으로 들려 달라고 했다. 그때 ‘우리 결혼했어요’ 프로그램에서 알렉스가 부르던 김동률의 ‘아이처럼’을 흥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는 매우 달콤한 곡이라며 마음에 드는 음악 스타일이라고 좋아했다.


어느새 내리던 빗방울은 멈췄다. 예기치 않은 비로 인해 늦장을 부린 나는 일을 하러 가야 했다. 그는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란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언제 기회가 된다면 자신의 연주를 보러 왔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런던은 언제나 흐리고 비가 오는 같은 날이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 다른 시간을 보내면 비가 오는 다른 날이 된다.


당시에 한국으로 돌아와 그의 홈페이지를 찾아 연주했던 영상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거의 십 년 전의 추억이라 지금은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페이스북이라도 할 걸........ 했지만 가끔씩 런던을 생각하면 같이 떠오르는 추억으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니 이것으로 만족한다.


피아노를 사랑하던 런던 피아니스트의 유쾌함이 여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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