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그림자
때로는 정규직이 되었다가 때로는 비정규직이 되어 살아가는 나의 기억 속에는,
여행에서 스치는 인연과 일로 스치는 인연과의 추억이 공존한다.
H는 일 년 동안 진행하는 프로젝트 면접에서 처음 만났다. 이미 내가 내정된 자리라 딱딱한 만남이기보다 점심식사를 하며 서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편안한 만남이었다.
내일모레 마흔이라는 H는 그의 동년배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와는 달리 나에게 굉장히 신선한 인상을 주었다. 작은 이야기에도 환하게 웃는 H에게서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가 태생부터 지닌 여린 감성과 그간 살아온 행적이 고스란히 첫인상에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는 H는 자신이 교육자가 된 것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었다. 특별히 뛰어난 것도 가진 것도 없었던 자신 또한 교육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지금의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그래서 국비로 진행하는 이번 교육 프로젝트를 성공시켜보고자 하는 열의가 가득했다. 나도 그런 H의 모습을 보며 이번 일이 내심 기대되었다. 학생들을 향한 열정과 일에 대한 동기를 볼 때, 일 년이 지나고 나면 나 또한 많은 것을 배울 것만 같았다. 그래서 H와 함께 프로젝트를 잘 해낼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첫 만남이 주었던 희망찬 밑그림과 다르게 일이 진행되고 나서부터는 자꾸만 H와 선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큰 문제는 없었다. 모든 일은 겉으로 보기에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각자의 의견이 달라 부딪치는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H와 나는 서로 다른 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 밑그림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건 거의 나의 몫이었고 H는 그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의 불만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채워지지 않는 성취감에 매일 조금씩 지쳐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H의 바쁨 때문이었다. 그는 바빴고 바쁘고 너무 바쁠 예정이었다. 어느 하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일초, 일분, 한 시간, 하루는 전국을 가로지르는 많은 약속과 다른 프로젝트들로 채워져 있었다.
‘돈이 필요한가?’
아니었다.
‘커리어가 필요한가?’
그러기엔 손아귀에 여러 가지 사탕을 잔뜩 쥐었다가 모두 떨어트려버리는 상황이었다. 그는 알게 모르게 잃는 것이 많았다. 특히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해 신뢰를 저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무리해서 일을 하지?’
‘하나라도 온전히 해내는 것이 H와 다른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이 아닐까?’
매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지쳐가는 나를 위한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그러다 H의 친구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작년에 H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아마도 무리해서 일을 맡는 건 슬픔을 잊기 위해서 그러는 걸 거야. 일을 안 하는 쉬는 날이 생기면 H는 술을 마셔. 그것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끝까지.”
무언가에 집착할 정도로 빠지게 되는 중독은 종종 나약해진 심리상태를 보완하기 위해 시작된다고 한다. H는 가족의 빈자리로 생긴 아픔을 일과 술로 채우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H의 행동과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내 앞에 선택지가 놓여졌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강하게 컴플레인을 하고 바꾸느냐.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남은 몇 개월을 H가 하는 대로 지켜보며 맡은 일을 완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순간순간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올 때면 욱하고 감정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표정관리가 안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엉켜있는 현실에 버거워하는 H를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H는 가느다란 전선 위에 두발을 딛고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내딛는 광대 같았다.
12월 31일.
드디어 프로젝트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나는 H에게 마지막 커피 한잔을 제안했다. 나는 H와 마주하며 지금까지 참았던 말을 꺼냈다. 더 이상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잃는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무리하면서 모든 것을 잃는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바란다고. H는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말을 꺼냈다.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이런 말해줘서 고마워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아마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알아도 바꿀 수가 없어요. 똑같이 살겠죠. 그게 저니까요.”
H다운 대답이었다. 그는 애석하다는 듯 찡그리며 미소 지었다. 첫인상에서 느껴졌던 순수한 느낌의 H가 다시 보였다. 그는 여리고 어리숙하지만 어쩌면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슬픔이 별이 되어 그의 눈에서 반짝였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슬픔을 해소할 시간이 필요하다.
먹고살기 위해 사회에 덩그러니 내몰렸지만 상처받는 마음이 있고, 슬퍼할 감정이 있는 사람이니까.
H의 삶에서 잠시 스쳐간 내가 감히 그의 깊은 슬픔까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여린 그 마음이 나아졌기를. 그리고 H가 지쳐 쓰러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