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그림자
2013년 여름, 나는 영화 제작 스태프였다.
촬영은 약 두 달 동안 진행되었고, 그중 3주를 제주도에서 머물렀다. 내가 맡은 일은 촬영에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하고 그에 따른 지출을 체크하는 일이었다. 현장에 있으면 좋지만 매 순간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나의 주 활동무대는 촬영장이 위치한 마을의 회관이었다. 왜냐하면 마을 회관이 제작 스태프의 숙소이자 식당, 비품 보관소인지라 그곳에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오르는 햇빛이 바로 떨어지는 여름 땡볕에서 유일하게 에어컨이 풀로 가동되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곳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통으로 내주신 동네 어르신들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낯을 익히고 오다가다 어르신과 인사를 하는 순간, 어느새 내손에는 커피나 주스가 들려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면 어르신 앞에 쪼그리고 앉거나 마루에 걸터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장에서 고생하고 있는 다른 동료들을 생각하면 종종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워낙 제주에서도 외진 ‘리’인지라 도시 촬영처럼 현장을 제지할 일손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 같은 잉여인간은 오히려 걸리적거리기만 했다.
할머니를 만난 건 제주 촬영이 막바지에 도달할 즈음이었다.
마을회관 근처에는 크진 않지만 나무들이 예쁜 감귤농장이 있었다. 농장은 숙박도 겸하고 있어 외부 스태프 숙소로 이용했다. 그래서 쨍쨍한 태양빛으로 길가에서 쓰러지기 딱 좋은 날, 중간 정산을 하기 위해 농장 건물로 향했다.
스태프들은 촬영을 나가 건물엔 아무도 없었다. 주인 어르신도 없었다. 나는 대청마루에 앉아 누군가가 오길 기다렸다. 그러다 안주인인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꽤나 많은 동네 어르신들을 알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감귤농장 할머니는 초면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살가운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는 나에 대해 묻지 않았지만 서울 영화팀이겠거니 하는 눈치였다. 정산에 대해 말을 꺼내자 할머니는 자신은 아는 것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마루에서 기다리면 주인 양반이 곧 올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당시 마땅히 할 일이 없던 지라 나는 아저씨를 기다리기로 했다. 들고 온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면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싶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슬며시 내 곁에 온 할머니가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재밌어?”
할머니는 내가 읽는 시나리오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나는 영화 찍을 때 쓰는 시나리오를 제본한 책이라고 설명하며 어떻게 쓰여 있는지 보여드렸다.
“나도 글을 종종 써. 많이 쓰는 건 아니고 조금씩.”
할머니는 농장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있었던 일을 적는다고 했다. 나이가 여든 가까워오는 만큼 얼마나 많은 인생의 우여곡절이 있었겠는가. 잊어버리기 전에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아서 적긴 하는데 아직 누구에게 보여준 적은 없다고 했다.
“영화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아. 내가 직접 그런 걸 쓰기는 어렵고 동향인 감독이 있으면 있었던 이야기를 말해주고 싶어. 제주에서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할머니의 가슴속에 한처럼 맺힌 이야기는 43 항쟁과 관련된 자신의 역사였다. 나에게 43 항쟁은 국사책에 짤막하게 나와 스치듯 지나간 역사였다. 그러다 대학에 와서 동아리 토론모임의 주제로 다시 마주했다. 43 항쟁을 꺼낸 것은 제주출신 선배였다. 잊지 말아야 하고 알아야 한다면서 43항쟁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해방 이후인 1948년,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에 앞서 이념의 차이로 비롯된 반대세력과의 갈등과 이로 인해 무고한 민간인까지 죽게 된 제주의 슬픈 역사였다.
당시의 할머니는 너무나 아름다운 꽃다울 나이였다. 해방의 기쁨에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좋은 시간도 잠시. 가족, 친구, 마을 어른 등 자신이 아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휘말려 죽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때의 이야기를 적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대신 43 항쟁에 대한 사연이 가슴속에 사무치는데 이를 담아줄 감독이 꼭 있었으면 한다며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했다.
“동향 감독이 들어줬으면 해. 제주출신이어야 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어. 그래서 그걸 영화로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어.”
할머니는 아는 감독 중에 제주출신은 없는지 물었다. 나는 머뭇거렸다. 일단 제주출신이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어떤 이를 소개한다는 건 나에게 굉장한 책임을 요하는 일이기에 난감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할머니에게 내 휴대폰 번호를 알려드렸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다면 연락을 주세요.”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미약하게나마 그때의 이야기를 남겨 드리고 싶었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며 주소를 알려주면 귤 한 상자 보내주겠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한두 달 뒤쯤 할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할머니는 제주 동향 감독과 만날 수 없는지 재차 물었다. 나는 할머니가 원하는 제주출신 감독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렇게 연락은 끊어졌고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과 제대로 사연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짧게 만난 그 순간에 느낀 감상은 여전히 나에게 남았다. 개인의 역사가 지역의 역사가 되고, 지역의 역사가 나라의 역사가 되었다. 큰 소요나 항쟁이 없어도 일상을 살아가는 지금 순간이 미래에 어쩌면 큰 역사의 한 줄기일 지리라.
작은 모래알이 모여 해변의 백사장을 이루듯,
개인의 별빛들이 빛나 역사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