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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May 20. 2017

단지 그뿐

2017.05.17


"그래, 나는 불운한 건 맞아,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아. 엄마 지금 많이 속상할 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건 그냥 벌어진 일일뿐이야, 엄마는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어.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지만, 역시 결과는 나쁠 수 있어, 그건 엄마 잘못이 아니야. 그냥 그렇게 된 것뿐이야. 불운한 일인 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자식을 잘 못 키운 게 되지는 않아. 엄마가 누구보다 애쓰고 열심히 한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더라도 우리가 불행해지는 건 아니야. 그 일들은 이제까지 계속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야, 그건 어쩔 수 없어. 그치만 그렇다고 우리가 불행하지는 않아. 엄마 정말 잘했어, 열심히 했어, 내가 이렇게 잘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 마."

엄마 아빠의 서른일곱 번째 결혼기념일인 5월 10일이었다.

속상하지 않아진다 하더라도 서글픔이나 쓸쓸함도 함께 사라지지는 않는다.
당연히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 일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나를 지켜보며
내가 약해질 때를 노려 나를 잡아먹으려 한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함께 살아야겠지.
때로는 잡아먹혀 손발을 잃어버리거나 머리가 통째로 사라질 때도 있을 것이다.

괴로운 일은 사라지지도 않고, 앞으로 생기지 않을 리도 없다.
하지만 그 시기 그 순간 그를 택한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고, 그 일들은 벌어졌다.
단지 그뿐이다.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속상할 때는 속상해하면 된다.
속상할 때는 속상해하고,
속상하지 않을 때는 속상하지 않으면 된다.
괜찮을 때는 괜찮으면 되는 것이고,
기쁠 때는 기뻐하면 된다.
지금 닿아 있는 내 손가락을 애써 치우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단지 내 손끝이 닿아 있는 물감을 칠한다.

굳이 괜찮을 필요는 없다.
당연히 나에게는 괜찮을 때가 있지만
단지 지금 괜찮지 않을 뿐이다.
나의 마음을 애써 치우고 정리하며 얼룩 하나 없이 닦아내지 않아도 된다.
그 얼룩이 지금은 많이 신경 쓰이겠지만
나중에는 뜻밖에 그럴듯한 무늬로 보이게 된다.

불운한 일은 불운한 일이다.
서글픈 감정은 서글픈 것이고
쓸쓸함은 쓸쓸함을 느끼게 할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나의 삶도, 나의 인생도, 나의 생활도, 그리고 나도 불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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