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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Aug 28. 2017

공감의 폭력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 못하던 친구가 한 명 있다. 자기에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어떤 감정을 담아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던 그 친구는 때로는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보였고 가벼움을 가장해 진중함을 회피했다. 그 친구는 결국 상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오랜 시간이 걸려 타인과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반면 어릴 적부터 내가 자주 듣던 이야기가 있다. 

"너와는 참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어, " 

"너는 내가 하는 말들을 잘 알아들어줘서 좋아," 

"너는 내가 어떻게 말을 해도 이해하고 캐치해줘서 좋아,"
"너는 나의 이야기에 잘 공감해줘서 좋아,"
이처럼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공감능력이 뛰어난 편에 속했고, 주변 사람들의 고충이나 어려움, 또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지내왔다. 이는 내가 가진 큰 능력 중 하나다.

첫 번째 문단에 쓰여 있는 친구의 이야기처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은 "공감"이다. 공감능력이 발달해 있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고,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들을 알아들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여러 타인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스스로를 파악할 수 있고, 타인으로부터 오는 리스크를 줄여 삶에 윤활을 제공해 만족을 더욱 높이거나,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진심을 전달해 어려움을 해갈하거나 기쁨을 느끼도록 도울 수 있다. 이처럼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주요한 요소로 사용되는 것은 공감능력이다.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거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 빠지지 않는 이유는 "대화가 잘 통해서"이고
대화가 잘 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것, 또는 네가 싫어하는 것, 네가 하고 싶어 하고, 네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듣고 그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나 답을 주어야 하는 것이 인간관계이며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이상 이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느 날부터 공감능력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졌다. 다변화되고 다양성이 주어져 각자의 생각과 각자의 주장만이 중요한 세상에 내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는 우리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알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나의 말에 공감해주는 타인의 존재는 힐링이라는 단어와 맞물려 사회에 빼놓을 수 없이 요구되는, 갖추어야만 하는 스펙이 되었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이 되고, 타인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는 죄악을 갖춘 사람 취급을 받았다. 상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 나의 친구도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 큰 부담을 느낀 게,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분명 공감은 세상에 필요하고, 너와 나에게 필요하며, 우리가 함께 지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최근 공감의 사용법은 의아함을 보이며 변화되었다. 분명 공감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돕기 위해 사용되며 그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여 관계의 친밀을 촉진시켜 집단 간 갈등을 줄이고 긍정적인 유대감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즉, 공감은 너와 내가 같은 길을 갈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서로가 하는 주장과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그를 통해 함께 지낼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해보자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공감능력이 필수적인 스펙이 된 요즘 세상에는 나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과, 들어주지 않는 적만이 상정되어 있다. 내 말을 알아듣고 내 편이 되어 나를 돕는 사람은 좋은 사람, 또는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와 다른 방향을 보이거나 나를 돕지 않는 사람은 공감하지 못하는 나쁜, 부수어야 하는 적이 되어버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고,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사회적 문제다. 내가 말하는 게 올바른 길이고, 내가 주장하는 게 바른 해결책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에 공감하는 사람이 당연히 바른 사람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들에게 이미 나와 다른 주장이나 다른 방향성은 없다. 내가 속한 나의 편이 이기는 게 최종 목적이며 바른 세상이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주장을 타파해야만 한다. 그들에게는 그게 올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이미 눈과 귀는 닫혀있고 시야를 넓힐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공감을 바라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 공감할 줄 모른다. 그들에게 공감이란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는, 나의 편인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감은 내 이야기를 알아듣고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을 찾고자 하는 게 아니다. 공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 사회적, 또는 관계적 갈등을 줄이는 데 목적이 있어야지 나의 주장만이 통용되고, 나의 말이 정답이라는 확답을 얻기 위해 사용되는 게 아니다. 공감은 시야와 시선을 넓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시야를 좁혀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귀를 닫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변에 나의 말에 긍정하는 사람만이 있다고 내 주장이 올바른 주장이 되지는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스스로 주변에 어떤 사람만을 남겨두었는지 지금 바로 확인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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