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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Nov 06. 2016

구원자와 가르침

2016.03.25


  어느 종교에서나 가장 중요한 것은 bible, 즉 경전이다. 종교의 리더나 성현의 행실과 업적, 말씀을 적어놓은 경전은 종교의 지침서가 되고 과거의 일과 현재, 미래를 엮는다. 경전에 따라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분리되고 올바른 일과 올바르지 않은 일이 나뉜다. 그 종교가 가진 신자가 많고 힘이 크다면 그 파급력은 더욱 크기 때문에 한 종교의 가르침이 전체 사회의 윤리, 도덕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동양에 있어서 유교나 불교의 사상이 그러하였고 그에 따라 삶의 기본과 자세가 성립되었다.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그렇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창세기에 인간이 식물과 동물의 이름을 짓고 다룰 수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인간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돌봐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오판하여 자연과 함께 사는 법을 잊어버리고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물론 공자나 붓다, 하느님과 예수님, 무함마드, 브라흐만 모두 뛰어나고 훌륭한 존재이다.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 행실과 가르침은 모두 존경할만하며, 넓게 보아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초월적인 진리라는 것은 하나를 관통하며 시간을 넘어선다. 위와 같은 존재들은 모두 초월적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총괄적으로는 같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종교를 유지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다. 경전이  쓰인 것은 성현과 현자들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지만, 그의 해석은 각자의 몫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같은 경전을 가지고 한 해석에 따라 갈등과 이념의 분리가 생기고 그에 따라 같은 신을 모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배타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그리스도교는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는 그 안에서도 수많은 종파로 나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많은 전쟁이 발생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있어서 반드시 바라보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잘못된 부분이다. 과연 하느님과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바라고 있었을까? 불교도 수많은 갈래가 생겼으며 각자의 나라에서 모두 가르침과 모습이 다르고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뉘며, 그중에서도 천태종과 조계종으로 나뉘어 서로를 비난한다. 이는 절대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경전이라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가르침의 기본이기도 하거니와 경전을 제대로 읽지 않고서는 신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전을 읽을 때 한 글자, 한단어, 한 문장을 가지고 논란을 피우는 것은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경전의 문장에 따른 행실을 정하기보다 그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의미가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느껴야 한다. 경전의 내용은 모두에게 다르며, 다가오는 의미도 모두에게 다르다. 나에게 다가오는 종교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각자 다른 의미를 가짐을 존중해야 한다.


  경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세속의 이득을 바라여 다르게 보아서는 안 된다. 종교의 번성과 신자의 유치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경전의 일부분의 문장을 내세워 특정한 가르침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하느님만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보이거나 다시 죄를 지어도 또다시 용서를 받으면 구원이 될 수 있다고 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죄의 용서와 사함은 큰 가르침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이야기이다. 하느님을 믿어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평화를 빌어줄 수 있다면 용서받을 수 있고 그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지 어떠한 죄를 저질러도 나는 하느님을 믿으니 괜찮다고 말한다면 그건 틀린 가르침이다. 종교와 구원자를 믿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과 이해를 통한 스스로의 자아 안에 있는 구원자와 진리를 찾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틀렸다. 모두 각자 종교의 믿음에 따라 다른 구원자를 가지고 있고, 그 구원자의 가르침에 따라 충분히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종교와 구원자는 틀리고, 내가 믿는 구원자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구원자들과 성현, 현자들은 정말 바르고 본받아야 하나 그 구원자들을 믿는 사람들은 편협하고 삐뚤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종교를 이끄는 사람들은 종파를 번성시키는 것에 눈이 멀어 이처럼 잘못된 가르침을 펼쳐서는 안 된다.


  종교나 구원자 자체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구원자의 대리인들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비록 많은 공부와 묵상을 통하여 특정한 직위를 얻었으나,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인간으로서의 생각과 판단, 이해를 갖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우리는 구원자를 따르고 구원자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지, 대리인을 믿는 것이 아니며 대리인도 당연히 구원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대리인의 언행과 생각에 실망하여 종교를 놓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며 의심을 갖고, 다른 행동과 틀린 행동을 한다. 스스로에게 완벽하게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망설임을 보이며 고민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구원자가 필요한 것이다. 구원자는 망설이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원자에게 의지한다. 나의 생각이 틀릴지 모르니, 틀리지 않는 구원자의 생각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그에 따라 종교를 이끄는 사람들의 말이 행동의 지침이 될 수는 있으나 정답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자의 가르침을 얻고 경전을 읽을 때 하나하나 분석하여 파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모두 성찰을 통하여 자신의 구원자를 찾고, 자신의 구원자가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지에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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