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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Jan 05. 2017

생명존중과 죽음의 존중

2016.04.26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본능인지 학습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어릴 적부터 죽음은 가능한 피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영생 얻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자가 내려와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토대로 교리를 만들었다. 진시황은 영원히 살기 위해 불로초를 찾으며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고, 파라오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기 위해 백성을 시켜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또한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들의 특징은 불사, 불멸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인간은 실제로도, 상상으로도 죽음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이는 현실세계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는데, 죽음에 이르는 길을 줄이기 위해 수많은 연구를 하고 치료제와 수술을 개발한다. 때로는 명줄을 붙잡기 위한 치료와 조치를 하기도 하고 미래에 치료제가 나올 때를 기다리고자 사람을 냉동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의 가장 큰 꿈은 죽음에 이르는 병의 극복이자 죽음을 피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다양한 치료는 인간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고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해 내지만 인간으로서의 주체적인 생활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환자가 어떻게 되더라도 숨이 붙어 있기만 하기를 원한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겠지만 환자가 주체적인 삶이 없는 생을 원하지 않을 때는 안타깝게도 환자 본인에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치료제와 방법을 개발하는 의사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바람을 이루어내고 환자와 보호자들의 괴로움을 줄이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으며 그는 반드시 필요하다.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고 특허 없이 배분한 조나스 소크 박사나 인류 최악의 전염병인 천연두 백신을 개발한 에드워드 제너, 흑사병이라고 불리며 중세 유렵을 공포에 떨게 한 페스트의 예방과 치료 등은 인류를 위기에서 구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도록 도왔다. 그 외에도 내가 모르는 수많은 병의 치료는 인간의 주체적인 삶을 주어지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죽지 않았어야 하는 사람들이 죽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하고 불필요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의 소중한 생명이 죽는 일도 발생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어디까지로 보아야 하는가는 고민이 필요하다. 치료와 수술로 인하여 인간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에 치료와 생의 선택은 환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의사로서는 가능한 생명줄이 붙어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환자로서는 이후 남은 자신의 삶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당장의 치료도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이후 자신의 삶은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누군가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그 무게와 짐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기 때문에 이겨내는 것 또한 자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떻게든 살아있어야 방법을 찾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본인의 선택과 생각이 가장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삶에 의미를 찾아야 생을 유지할 수 있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사실 삶과 죽음이란 한 끗 차이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죽음이 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영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많은 대비를 했다고 오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체적이고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력만이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삶에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처럼 죽음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인간은 살아가는 데에서만 의미를 찾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고 영생을 찾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죽음에서도 분명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의 죽음은 사라짐과 동의어가 아니다. 자신은 어딘가에 반드시 남아있고 존재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죽음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충분히 괜찮은 삶으로 생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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