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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l 26. 2016

씽크홀이라는 이름의 일상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도심 곳곳에서 균열과 침식으로 인한 이상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싱크 홀(sink hole)이라고 했던가. “지하수가 고갈되고 지반이 약해지면서 지표에 구멍이 뚫리는 현상입니다.” 전문가로 보이는 남성이 별 것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설명을 한 뒤에도 앵커는 호들갑을 떨며 뉴스를 이어간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산전수전 다 겪은 친구 하나가 술을 따르다 말고 꽤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 괴물이 도심에 출몰하여 대형 빌딩을 무너뜨린다고 해도 별로 놀랍거나 새로울 건 없잖아. 마찬가지로 설령 땅이 꺼져 건물 한두 채, 이웃 몇 사람쯤 흔적도 없이 사라진대도 뭐 그 정도는 이미 영화에서 다 보고 겪은 일이니까. 아마, 너라면 크게 놀라진 않을 거야. 나 역시 전문가처럼 심드렁하게 답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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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영화가 현실을 무디게 만들어버렸어. 고개를 젖히고 한 잔 털어 넣은 친구 녀석이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도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심드렁해지는 게 우리 사회의 문법이라지만 지반이 약해져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있다는데도 당최 실감이 나지 않는 건 뭐지. 정말 친구 말대로 괴수영화 때문일까. 문제는 괴수영화도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 결국 현실을 무디게 만든 건 모질고 모진 사람들이라니까. 에잇, 술이나 마시자. 다시 잔을 부딪혀보지만 재난과 전쟁과 싱크 홀 이야기로 가라앉은 분위기가 다시 살아날 리 없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세상 분위기는 이미 가라앉을 만큼 가라앉아 버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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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까마득히 내려앉은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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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다면 기왕 가라앉은 김에 가만히 생각이나 좀 해보자. 조금씩 지반이 침하되고 있던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지표면 위에서 아등바등 살아왔다는 거잖아. 눈에 흙이 들어오고 목에 칼이 들어올 때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는 것이 당당한 삶의 자세라 배웠고,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차갑게 살아야 손해 보지 않으리라 믿었다고. 그런데 객관적으로 좀 냉정하게 바라보자면서 너무 냉랭해졌던 게 아닐까. 일단 나부터 좀 살자. 살고 보자. 냉혈한처럼, 선을 그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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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마련한 내 집인데, 그 집값이 떨어진다는데 당신이라면 발버둥 치지 않겠는가. 이렇게 물으면 사실 딱히 할 말은 없다만 그렇게 악을 쓰며 지켜내려 했던 것이 고작 자식새끼한테 물려줄 아파트 한 채였다는 사실은 솔직히 좀 실망스럽군. 아니지. 그 하찮은 재산권 하나 지키는데도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는 분들이니 아마 전쟁이라도 나면 필경 목숨을 바칠 분들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어디 사회적 배려 대상자가 당신 옆집으로 입주하게 되면 삶의 질이 느닷없이 지하 수천 미터 나락으로 떨어지기라도 할까봐 그랬던 건가. 당신 눈에 흙이 들어가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만 결국 그런 태도가 다른 사람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한다는 사실, 이제 좀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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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위태한 세상에서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벌금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시각장애인 안내견이 버스에 오르는 꼴은 못 보겠다며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의 버스 승차를 끝내 거부한 버스기사나 새로 수리한 엘리베이터 내부가 긁힐 수 있으니 장애인 휠체어 진입을 자제해달라며 공고문을 내건 아파트, 대학 서열놀이에 빠져 타인에 대한 조롱과 차별을 일삼는 대학 훌리건들. 그렇게 악을 쓰고 용을 써가며 당신의 집값을, 당신들의 자리를, 당신들의 그 알량한 학벌을 지키고 있던 그 순간에도 그 아래 어딘가는 조금씩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지 않는가. 그러니 이제 좀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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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린 이미 지하 수천 미터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린 걸지도 모른다. 당신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세상엔 여기저기 숭숭 구멍이 뚫려버렸고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어서야 ‘싱크 홀’이라는 이름의 공포가 당신 앞에 슬쩍 나타난 걸지도. 그러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은 그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지반 위에 아등바등 쌓아올린 마천루 같은 거 아닐까. 뭐 그 정도는 이미 영화에서 다 보고 겪은 일이니까 크게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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