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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Dec 20. 2015

두발 자전거에 대한 명상


아이는 두발자전거에 익숙해졌다. 이미.

내가 뒷좌석을 잡고 기우뚱거리며 방향을 일러줄 일이 이제 없어진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매우 다정한 목소리로    "자, 넌 할 수 있어" 따위의 말로 용기를 불어넣거나, 어느 프로구단의 감독과 같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전거는 네가 핸들을 돌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거야!" 소리를 질러댈 일도 이젠 없는 것이다.

아이가 커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의 역할이 하나 둘 줄어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이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핸들을 틀며 중심을 잡아가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조금은 서글프다.

아이가 두발 자전거를 타겠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달 전 일이다. 네 살 때 사준 네발자전거의 보조 바퀴를 떼어내면서 나는 아이의 말간 눈망울을 쳐다보며 경고했다.

"너 아빠 없을 때 자전거 혼자 타면 절대 안 돼"

그건 걸음마를 이제 막 시작한 아이를 차도로 내보내는 것 같은 심정에서 비롯된 말이었지만 철없는 아이와 어쩌면 그보다 더 철이 없어 용감한 아내에게 별로 유용한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넘어졌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지만 끝까지 핸들을 놓치는 않았단다. 처음에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던 녀석은 어느새 출발만 봐주면 저 혼자 뒤뚱거리면서 아파트 단지의 끝에서 끝을 오가는 실력을 보여주었다는 말도 들린다. 그리고 자전거 보조바퀴를 떼어낸 후 며칠 동안 내가 당직이다, 술자리다 바쁜 시간을 보내던 사이 저 혼자 당당하게 자전거를 끌고 거리로 나오게 된 것이다.

듣기로는 주차되어 있는 다른 사람의 차 앞 범퍼를 들이박기도 하고 멀쩡히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뒤를 덮치기도 했다나. 빗살무늬 상처와 빨간 소독제 자국이 말라붙은 무릎팍을 보며 녀석의 지난 몇 일간의 '고행'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

녀석의 자전거는 또 어떤가. 이미 앞에 달린 바구니가 떨어져나가고, 바퀴는 좌측으로 약간 휘어질 정도로 심각한 외상을 입은 것이 상처투성이의 녀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도 삐걱거리는 안장에 올라서는 아이의 입가에는 이미 자신감 가득한 미소가 묻어나고 있었다.

"못 말려..."

아이의 모험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그 녀석의 어미 되는 사람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뱉어낸 말이다.
아이의 도전기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내내 가슴 졸인 엄마의 표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담담한 아내를 보며 문득 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숨을 한번 고른다. 어미의 무관심에 가까운 교육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녀석이 제힘으로 자전거를 배운 것 아닌가.

자율과 통제라는 각자의 확고한 교육관을 주장하느라 늘 고성이 오가는 부부지간이긴 해도 해가 뉘엿뉘엿 내려앉는 가을저녁,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달려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행복감은 서로 다르지 않다. 아내와 나는 들판을 뛰어다니는 한 마리 말처럼 자유로운 아이의 모습 앞에서 서로 다른 교육방식에 대한 섭섭함을 접는다.

"얘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두발자전거라니!, 벌써?"

두 눈으로 아이의 모습을 보고 만족한 표정을 짓다가 어느새 나는 경악하고 만다. 두 돌이 채 안되었을 때 네 바퀴가 달린 붕붕카를 타고 다니던 녀석이 어느새 세발 자전거로 취향을 바꾸고, 어린이집 입학과 동시에 양쪽으로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고집하다가 이제 보조바퀴까지 떼어낸 채 세상을 향한 위태로운 곡예를 시작한 것이다.

그래, 인생이 뭐 별건가. 네발자전거에서 보조바퀴를 덜어내고 뒤뚱거리며 달려가다가 우연히 중심 잡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인생 아닌가. 그렇게 달리다가 쉬고, 쉬면서 만나는 픙경에 낯설어하며 좌절도 하지만 이내 털어 버리고 다시 페달을 밟는 우리들의 모습이 저 녀석의 불안한 자전거 운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녀석의 급작스러운, 아니 자연스러운 취향변경보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나에게 있다. 아이가 자전거 종류를 바꿔온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끼는 것이나, 내가 뒤를 잡아주고 일으켜줄 시간조차 없이 여기만큼 왔다고 느끼는 아쉬움, 모두 아이보다는 나를 위한 감정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쯤 보조바퀴를 떼어냈던가 싶다. 아니 아직도 전화기 넘어로 걱정 가득한 목소리를 내시는 부모님이 그리운 걸 보면 아직 보조바퀴를 떼어내지 못한 건 나 자신이 아닐까?
"속도"라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녀석은 아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저녁밥상 물리기가 무섭게 두발자전거를 끌고 밤거리로 나선다. 삐딱거리며 놀이터 마당을 끼고 좌측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내리막길을 타고 속도를 낼 요량이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주섬주섬 옷을 차려입고 녀석을 따라 나선다. 아무래도 아들하나 제대로 건사하려면 이제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 거는 법을 정밀하게 지도해야 할 것 같다.

선선한 저녁나절, 보란 듯 내 옷깃을 스치며 속도를 내는 녀석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해야 할 일 하나를 무사히 마쳤음을 아쉬워하기도 하고 또 안도하기도 한다. 벌써 서른 다섯 번째 가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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