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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Oct 11. 2016

영화 <죽여주는 여자> 후기

끝내 자존감을 지켜내는 소수자들 이야기

1.
본명 양미숙. 50년 6월. 하필이면 전쟁통에 태어났다. 작년 겨울 청주 교도소 여사동에서 연고 하나 없이 죽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승에 머문 시간은 고작 66년. 그녀는 북에서 피난 내려온 삼팔따라지 전쟁고아다. 난리 통이었으니 당연히 먹고살기 어려웠고 나이를 먹도록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안 해본 짓이 없었다. 남의 집 식모살이에 여공생활을 전전하다가 돈이 된다는 이유로 동두천으로 흘러들어갔다. 미군들에게 “다리를 벌려주는” 양공주 생활을 하다가 흑인 병사의 아이를 덜컥 낳았고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입양시킨 뒤 “평생을 빌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칠십이 가깝도록 평생을 자기 손으로 벌어먹고 살았다는 미숙씨의 또 다른 이름은 소영이다. SO YOUNG. 동두천 양공주 시절 얻은 이름이지만 차라리 미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 보다 편했다. 종로3가 탑골공원 근처를 배회하며 기력 없이 욕정만 남은 노인들을 유혹해 “연애”를 해주고 돈을 받는 것이 소영씨의 밥벌이였다. 노인들은 그녀를 “죽여주는 여자”로 불렀고 젊은 것들은 그녀를 “바카스 할머니”라고 불렀다.

2.
소영씨는 정말 “죽여주는 여자”다. 임질에 걸렸지만 노인들은 그런 사정도 모른 채 그녀를 찾는다. 그래도 미군부대를 전전하며 익힌 스킬 덕분에 그녀는 제법 잘나갔다. 남성을 대하는 스킬 뿐 아니다. 그녀는 어려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품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죽여주는 여자”다. 엄마를 잃고 갈 곳 없는 코피노 아이를 집에 데려와 건사하고 풍을 맞은 고객 할아버지의 병문안을 다니는 식이다. 마음이 모질지 못해 남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한다.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제 힘으로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노인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노인의 입에 농약을 들이 붓는가 하면 치매에 걸려 아무런 희망이 없는 독거노인의 부탁을 받고 북한산 낭떨어지 끝에서 그를 밀어주기도 한다. 그녀가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된 것도 사실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도 진실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사람들은 그저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늙은 창녀에 살인자 누명까지 쓰게 된 소영씨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가끔 성매매 노인들의 삶을 알고 싶다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찾아오는 철없는 다큐멘터리 감독만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건 정말 칠십 평생 처음 있는 일이어서 소영씨는 그리 탐탁치 않다. 어차피 그렇고 그런 세상이야 어찌 되었든 그녀가 정말 ‘죽여주는 여자’였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런 저런 의미로 말이다.

3.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제목의 중의성 만큼이나 복잡한 영화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녹여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병든 독거노인,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트랜스젠더, 코피노, 혼혈 미군병사와 같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이다. 그럼에도 이 거친 캐릭터들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스스로 존엄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입에 올리기도 역겨운 성적 노동을 하며 살아가지만 평생 스스로의 힘으로 벌어먹고 살았다는 자부심 가득한 소영씨도, 아무데서나 아무렇지도 않게 의족을 벗으며 만면에 웃음을 짓는 도훈씨(윤계상 분)도, 치욕스러운 삶을 마감하기 위해 소영씨에게 ‘죽여주는’ 서비스를 부탁하는 노인들도 모두 나름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내기 위해 애를 쓰는 인물들이다. 그냥 그런 영화들 속에 소외계층들이 타자화, 대상화되는 것에 비하면 이들이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자신만의 뚜렷한 명암을 가진 존재들로 묘사되는 것은 이 영화만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건 이들이 사회로부터 일정한 거리 넘어에 ‘격리’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영화적 안타까움이라기보다는 현실의 안타까움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애초부터 삶이라는 것 자체가 생존의 문제였던 소영씨는 그렇다 쳐도 그럭저럭 자기 식솔들을 먹여 살리며 나름 어른 대접을 받았던 노인들조차 죽음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존재론적 절망이 단지 성적인 능력의 퇴화에만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기 전에 그들은 성적으로 괴리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며 그 과정 속에서 소영씨의 존재는 유일하게 자신들의 죽어버린 욕정을 발화하는데 필요한 협조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죽어가는 욕정을 살려주는 화끈한 여자라는의미로, 죽어야만 부지할 수 있는 존엄을 위해 협조하는 여자라는 의미로 그녀는 “죽여주는 여자”인 셈이다.

4.
한국 영화를 많이 본 편이 아니라 윤여정의 예전 작품들을 눈여겨보진 않았다. 김수현의 드라마에서 잔소리 많은 코맹맹이 중년여성으로 나오는 모습을 기억하지만 특별히 인상적으로 본 적은 없고, 문제적 남자 조영남의 전처였다는 사실도 큰 감흥이 되지 못했다. 그저 <바람난 가족>이나 <돈의 맛> 같은 몇 편의 영화 속에서 시니컬하고 도시적인 중년여성의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면서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다시 보게 됐다. 특히 살인 혐의를 쓰고 경찰에게 체포되어 가는 순찰차 뒷좌석에서 눈 내리는 거리를 쳐다보며 담배연기를 내뿜던 그 담담하면서도 애잔한 눈빛은 그녀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소화할 수 없는 연기라고 생각한다. 아이돌 가수 출신이지만 늘 저예산 독립영화를 통해 착실히 연기자의 길을 걷는 윤계상의 연기도 좋았다. 이제는 정말 영화에 대한 그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첫 연기였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를 해낸 트랜스젠더 역의 안아주씨도 좋았다.

5.
가끔 돈 만원 내고 이렇게 좋은 영화를 봐도 되나 싶을 정도의 영화가 있다. 작년에 본 <소수의견>이 그랬고 올해 본 <최악의 하루>가 그랬던 것처럼 <죽여주는 여자>도 마찬가지 영화다. 천만 영화니 대박영화니 그런 타이틀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우리 영화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아트하우스에서나 하루 몇 회 상영에 불과하여 보기 어렵겠지만 그런 저런 핑계 대지 말고 퇴근길에 생각이 나면 혼자라도 가서 보라고 추천한다. 당신의 남은 삶에 대한 묵직한 성찰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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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죽여주는 여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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