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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Oct 13. 2016

영화 <우주의 크리스마스> 후기

선택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 격려와 위로의 영화

1. ‘선택’과 ‘미련’은 동의어        


세 명의 우주가 있다. 19세의 우주와 26세의 우주 그리고 38세의 우주가 그들이다. 단순한 동명이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이름 뿐 아니라 같은 서사와 운명을 가진 서로 다른 존재들이다. 독립된 우주는 무한대의 개수만큼 서로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지만 그 중 세 명의 우주가 우연히 같은 시간대에 한 차원에서 만난다.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어쩌면 우주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름이 아니라 불가능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모든 존재들의 이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38세의 우주는 자신보다 어린 우주들이 앞두고 있는 현재의 선택 앞에서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반추한다.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놓쳐버린 또 다른 선택에 대한 미련이 38세 우주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가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하는 다소 무쓸모한 공상이 타인의 삶에서 우연히 재현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김경형 감독의 신작 <우주의 크리스마스>에서 38세 우주 앞에 놓인 질문들은 결국 나를 향해 파고드는 질문이 되어 버린다.      


‘선택’이라는 건 어찌 보면 다른 하나의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의미다. 선택하지 않음으로서 나의 운명과 멀어진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미련’이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서사의 중심이다. 영화는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운명이라면 도망가거나 회피하지 말자.”는 다소 철학적이면서 또 일상의 아포리즘 같은 주제를 던진다.     

    


2. 평행우주론과 멜로의 만남      


‘세상’은 우리의 인식틀 내에 존재하는 협소한 공간의 명칭이다. 제 아무리 우주가 무한다하고 해도 지각됨으로써 ‘세상’이라고 불리는 공간은 우리들의 직간접 경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경험적 공간 뿐 아니라 상상의 공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달에 착륙하기 전까지만 해도 달은 그저 지각의 범위 내에 존재하는 판타지적 공간이었다. 비록 달이라는 위성이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달이 우리의 지각 범위 내에 있지 않았다면 그 많은 판타지가 가능했을까. 지각할 수 있는 대상과 판타지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무한 공간으로서의 우주 역시 그런 연결고리를 통해 예술작품 속 서사로 승화되어 왔다.      


특히 상상의 장면을 시각화되는 ‘영화’라는 장르에서 지각 범위 밖에 있는 또 다른 차원, 혹은 공간은 <클라우드 아틀라스>와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꺼리들을 만들어 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평행우주론’과 불교의 윤회설, 연기설이 버무려진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공상적 애니메이션이나 SF영화의 단골 소재로 적합하다.    

  

그러나 영화 <우주의 크리스마스>는 이러한 우리들의 통념을 깨고 이 미스테리한 공상을 멜로물로 녹여냈다. 시간을 초월한 남녀의 사랑을 그린 영화로 <시월애>나 대를 이어 사랑을 이어가는 <클래식> 같은 멜로영화가 있었지만 전혀 다른 시공에 존재하는 세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삶에서 같은 운명과 서사로 엮인다는 공상과학영화 같은 설정을 가진 멜로영화는 처음이다. 그런 점에서 무척 신비롭고 독특한 영화다.    

  

영화 중반부까지는 과연 이 복잡하고 미스테리한 우연들을 감독이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았지만 중반부 이후 영화의 의도를 읽고 난 후부터는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 ‘우주’는 독립적 존재를 공간적 개념으로 상징화한 이름이고  ‘크리스마스’는 기적의 시간을 상징한다. 영화를 한 줄로 말하자면 “세 개의 우주가 만나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이야기”쯤 되지 않을까.


3. 흔치 않은 미술 영화      


 영화 <우주의 크리스마스>는 미술 애호가들이 좋아할만한 영화적 구성을 갖추었다. 세 명의 우주가 모두 화가 지망생이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거나 주저하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세 명의 운명이 겹치는 교집합의 영역에는 첫사랑과 그림에 대한 열정이 담겨있다.       


 처음 주인공 성우주가 동해의 어촌마을에 위치한 골동품 가게를 카페로 리모델링하기 위해 모델로 삼는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다. 통창으로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카페에서 사람들은 홀로 시간을 보내거나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두운 골목길과 대비되는 실내조명 탓에 사람들이 더욱 더 고립된 존재로 표현된 그림이다. 아마도 영화속 38세 우주는 잘못된 선택으로 고립된 자기 운명을 카페라는 공간으로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처음 생각과는 달리 카페는 완성되지 않는다. 지붕에 고흐의 <해바라기>를 연상시키는 그림을 얹었고 주인공 우주가 벽화를 그리지만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수준의 시각적 쾌감으로 이어지지 않아 아쉬웠다. 다만 영화 내내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들과 26세 우주가 자신의 남자를 아를로 떠나보내기 전에 같이 묵었던 방의 색채나 구도가 고흐의 <아를의 방>을 떠올릴 수 있었던 점은 즐거웠다. 아울러 재훈의 유고전이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 씬에 등장하는 초상화들도 좋았다.      


4. 그리고 소소한 이야기들      


유독 나뭇가지 흔들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막대한 예산을 투자한 영화 같으면 모르겠지만 이 영화처럼 저예산으로 촬영해야 하는 경우 영화가 이야기하고자하는 것들을 모두 형상화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 같다. 나무가 흔들리는 장면에서 바람이 느껴졌고 나는 그것이 세 개의 우주(공간)가 연결되는 상황에 대한 시각적 상징이라고 읽었다.      


세 개로 보이는 달이나 골동품 가게에서 가져온 혼천의(천체관측기 모델), 지구를 탈출하는 구멍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도 저예산이라는 한계 속에서도 영화가 얼마나 섬세하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영화의 칠할 이상을 김지수가 끌고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비중이 있는 배우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보는 그녀 특유의 감성이 돋보였다. 19세 우주를 연기한 윤소미도 매력적이었다. 미래가 기대되는 배우다. 몇몇 배우들의 대사가 너무 단조로워서 몰입에 방해가 되었던 점은 아쉽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상에 없던 시도를 하는 것이 참 어려웠을 텐데 쉽지 않은 시도를 한 김경형 감독님께 축하와 응원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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