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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an 15. 2017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 후기

20년의 분노를 담은 소심한 복수극

긴장감을 가지고 다음 장면을 기다리다가 암전 속에서 엔딩을 맞는 영화가 가끔 있다. 자, 다음 장면은 없으니 그만 나가주세요. 라고 말하듯 천천히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팝콘봉투를 끌어안고 소파에 푹 파묻혀 있던 관객들은 적잖이 당황한다. 어? 이게 뭐지? 대체 뭘 말 하려는 거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부조리극을 보고 나온 것도 아닌데 머릿속 정리가 쉽지 않다. 액자의 안과 밖에 놓인 두 개의 스토리가 부딪히고 섞이면서 다듬어지는 정서적 화학반응은 영화관을 나선 후에서야 일어난다. 영화를 볼 때는 전체가 보이지 않는데 곱씹을수록 의미의 조각들이 하나 둘 맞추어지고 비로소 전체가 들어온다.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키워드는 복수다. 친절한 감독은 영화의 중반부에 이 거대한 메시지를 미술 소품을 통해 수줍게 드러낸다. 수전이 관장으로 근무하는 갤러리에 걸린 미술작품엔 커다란 영문으로 “REVENGE”라는 글자만 적혀있다. 그러나 수전은 그 작품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사들인 작품이지만 그녀에게 각인된 의미는 아니었던 것이다. 부족한 것 없는 삶을 살아 온 그녀는 적어도 피해자는 아니었음으로.


“너는 아니겠지만 토니는 분명히 기억해”

토니 헤이스팅스 가족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소설 속 형사 보비는 가해자인 레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에드워드가 20년만에 수전에게 보내온 소설이다. 가해자는 기억을 지우려한다. 피해자에게 공감할 사람이라면 해를 끼칠 일도 없었겠지만 설령 공감능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저 쉽게 생각했을 것이다. 수전이 별 생각 없이 사들인 작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반면 피해자는 쉽게 잊지 못한다. 돌아볼 때마다 경악하고 좌절하지만 또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복수의 원천이되기도 하다. 그래서 피해자인 에드워드는 과거를 곱씹는다. 괴한들에 의해 자신의 아내와 딸을 잃은 소설 속 토니 헤이스팅스 역시 그렇다. 토니는 에드워드의 분신이자 화자다. 에드워드는 토니의 입을 통해 수전으로부터 부정당한 자신의 고통을 역설한다.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수전은 보기 드문 성품의 가해자다. 수전은 에드워드의 소설 초고를 읽어내려 가는 내내 고통과 마주한다. 미숙한 첫사랑을 떠나 현실을 택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뒤틀린 삶을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인 셈이다.


정말 와신상담이 따로 없다. 나약하다는 말에 대한 분노를 끌어안고 20년을 살아온 에드워드는 영화 <마더>의 도준보다 못한 미숙아 아닐까. 차라리 수전의 밀회 현장을 보았던 그때, 짱돌이라도 던지지 그랬니.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내가 에드워드와 정신적 교감을 충분하게 하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20년이 넘게 키울만한 분노는 아닌 거 같다는게 연애를 책으로만 배운 나의 짧은 생각.


영화의 도입부부터 시각적 충격이 만만치 않다. 제니 샤빌의 그림이 연상되는 퍼포먼스와 설치미술, 제프쿤스의 강아지, 데미언 허스트 풍의 설치작품이 영화 곳곳에 배치된다. 현대미술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풍부한 볼거리만으로도 반가운 영화다. 제이크 질렌할의 우수에 찬 눈빛연기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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