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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an 31. 2017

영화 <단지 세상의 끝> 후기

루이, 새처럼 떨어지다

사내가 문을 나서려 하자 뻐꾸기시계 안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빠져나와 집 안을 퍼덕거리며 날아다닌다. 언제 집에 들어온 건지, 그 작은 곳에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알 수 없다.


뻐꾸기시계 소리와 함께 맹렬하게 날개 짓을 하던 작은 새는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갑작스런 새의 등장에 놀랐던 사내는 다시 집을 나서기 위해 문으로 향하고 사내의 뒷모습을 비추던 카메라는 황급히 카펫 위에 떨어져 있는 새에게 시선을 돌린다.


천장을 향한 채 두어 번쯤 숨을 고르던 새는 이내 숨을 멈춘다. 작고 볼록한 솜털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그 위로 묵은 햇살이 쏟아진다. 문을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과 죽은 새의 모습이 잠시 겹친다.  


평범한 가정 집 안에서 맞은 안온한 죽음인 것 같지만 새에겐 낯선 곳에서 맞이한 당혹스러운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집을 떠나고 새는 죽는다. 결국 같은 운명인 셈이다. 그러니까 그건 단지, 세상의 끝 일 뿐이다.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은 가족 안에서 조차 해소되지 않는(아니 더 나아가 가족이기 때문에 해소할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을 그린 영화다.


집을 나온 지 12년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온 루이(가스파르 울리엘 분)는 다시 만난 가족들이 어색하기만 하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이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위로를 받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여동생 쉬잔(레아 세이두)은 애틋한 듯 예민하고 형 앙투앙(뱅샹 카셀)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꼬일 대로 꼬여 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난생 처음 본 형수 카트린(마리옹 꼬띠아르) 뿐이지만 가까이 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가족들은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내고 경쟁적으로 담배연기를 뿜어내고 번번이 다투고 삐치고 화를 내면서도 또 풀어지고 기댄다. 상처를 후벼 파는 것도 상처를 보듬는 것도 가족이다. 루이는 이 관계들이 빚어내는 끈끈하면서도 이질적인 풍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어쩌면 갑작스러운 루이의 방문이 가족들에게 더 어색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떠나려는 루이에게 “다음에 더 잘 준비해서 맞아주겠다”는 엄마(나탈리 베이)의 말은 가족들 역시 루이를 맞을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죽음을 앞둔 루이는 떠나는 순간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못한다. 비록 루이의 세상은 그것으로 끝이겠지만 가족들의 세상은 그 곳에서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엔딩곡의 가사 대로 ‘고난은 신만이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가족도, 살아있는 누구도 독립된 존재로써 ‘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는 법이다. 엔딩곡을 듣고 있자니 감독 자비에 돌란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가족은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도 못하면서 발목이나 잡는 걸림돌이라니까. 몇번을 말해야 할겠니. 사람은 원래 외로운 존재라고." 


배우들의 얼굴을 지나치게 가까이 잡는다. 화면 가득 얼굴의 향연이 펼쳐진다. 모여라 꿈동산의 프랑스영화 버전이랄까. 미세한 표정변화 하나하나까지 눈에 들어온다. 마치 배우들과 밀담을 나누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카메라는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호흡이 느껴져서 좋기도 하지만 러닝타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쉴 틈 없이 쏟아지는 프랑스어와 배우들의 얼굴공격에 지쳐버렸을 것이다.

고향을 향하는 길, 머물고 스치는 루이의 시선부터 섬세하다 싶었는데 가족들이 나누는 공격적 대화와 그에 따른 표정변화, 짧은 시간 동안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주제를 관통하는 배경음악의 선정도 몰입에 도움이 된다. 뚜렷한 기승전결, 명쾌한 스토리를 원하는 분들에겐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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