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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Feb 12. 2017

영화 <'재심'(2017, 김태윤)> 후기

현실의 감동을 다 그리지 못한 아쉬움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재심>이라는 단 두 글자에 영화의 극적 서사성이 모두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심은 증거의 위·변조나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자백 등 확정된 판결을 명백히 뒤집을 만한 증거가 확인돼야 비로소 개시된다. 하물며 화투판에서도 '낙장불입' 원칙이 통용되고 장기판에서도 잘못 둔 한수를 무르기 쉽지 않은 법인데 확정된 유죄를 뒤집었을 때 그 뒤에 깔린 스토리는 과연 어떻겠는가.      


누명을 쓰고 궁지에 몰린 자의 억울한 사연, 진실을 밝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조력자의 고난, 죄를 덮으려 더 큰 죄를 저지르는 수사기관의 음모, 결국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진실을 밝히는 감동스토리... 제목만으로도 이러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니 이 보다 더 영화적인 제목이 있을까. 영화 <재심>은 제목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작품인지도 모른다.      


그 뿐 아니다.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실화를 모티브로 하는 점도 대중적 관심을 끌기에 좋은 조건이다. 배우 정우가 연기한 박준영 변호사는 스토리펀딩을 통해 3억 원을 모금했을 정도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거의 완벽한 흥행 조건을 갖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기대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재심전문 변호사로 불리는 영화의 실제 모델 박준영 변호사


영화는 절박한 사정에 놓인 한 인물을 중심으로 ‘법’이라는 문명의 산물이 과연 정의를 바로 세우는 수단인지, 아니면 기득권을 위한 합리화의 수단인지를 묻는다. 하지만 이 묵직한 주제를 풀어나가는 건 영화 자체의 힘이라기보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의 힘이다. 영화는 단지 현실의 사건을 재구성할 뿐이다. 이 재구성의 과정은 등장인물들이 진실에 접근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관객이 원하는 건 이미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고 있는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사건이 해결되면서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그 지난한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가 그 과정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 <재심>은 치열한 공방이 펼쳐지는 법정이 아니라 법정에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에만 집착할 뿐이다. 재심 개시결정을 이끌어 내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고 증언자를 확보하는 과정이 극의 전개에 중요한 장면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신을 수사했던 형사를 찾아가 난투극을 벌이는 현우(강하늘 분)나 진범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변호사의 모습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법정드라마를 기대하고 간 관객들은 난데없는 액션신에 감정이입을 할 수 없다. 시멘트 벽 하나에 사건현장 지도를 항공 촬영한 듯 그려내고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두 주인공이 머리를 맞대는 장면도 범죄스릴러물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온 클리셰라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현실에 덧대어 짜깁기를 하느라 내세운 허구의 인물들도 전개의 설득력을 뒷받침하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 영화 초반부에 특유의 코믹연기로 관객들의 긴장감을 덜어주던 동료 변호사 창환(이동휘 분)은 어느 지점부터 이준영 변호사(정우 분)와 대립구도를 형성하며 돌변한다. 완고한 현실의 벽을 절감하게 해주는 역할이었다고 에둘러 변명할 수 있겠지만 이미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는 관객들에겐 몰입을 방해하는 군더더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방레지 수정이라는 인물도, 인신매매 위기에서 수정을 탈출시키다가 살인사건에 휘말렸다는 식의 설정도 그렇다.      


그렇다고 영화 <재심>의 장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법정공방의 긴장감 대신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와 유동적 대립구도가 주는 긴장과 이완이 관객들을 빠져들게 한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정의와 상식의 정의는 다른 것인가.” “법률가는 누구를 위한 사람들인가.”와 같은 묵직한 주제의식을 극의 종반부까지 밀고 가는 뚝심도 좋았다. 이준영 변호사역의 정우와 현우의 엄마역을 맡았던 김해숙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특히 당뇨에 걸려 시력을 잃어버린 채 더듬거리며 뻘밭에서 바지락(?)을 캐는 장면이나 아들 현우가 살짝 웃었다는 이유로 손뼉을 치며 울먹이는 장면은 김해숙의 필모그라피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연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 영화가 검찰개혁을 포함한 형사사법개혁의 필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실제사건 자체가 우리사회에 던지는 문제의식이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영화는 실체적 진실발견과 정의구현에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수사기관의 유착관계가 어떤 폐해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진범을 수사하던 군산경찰서 형사반장(박철민 분)이 물증확보를 위해 폐기물 처리장을 뒤지던 중 압수수색영장이 기각되었다는 말에 분을 참지 못하는 장면이나 사건을 조작한 담당 형사가 사건을 제대로 은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검사에게 발길질 당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두 수사기관이 종속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검찰이 모든 경찰의 수사를 지휘하는 구조다.  영장의 청구 역시 경찰이 법원에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검사를 경유하게 되어있다. 이러한 구조 하에서 양 기관은 언제든 유착될 수 있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검사는 독점적 권력에 취하고 경찰은 그 권력의 비호하에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식이다. 아무리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어도, 목격자의 증언이 있어도 검사가 영장을 청구하지 않거나 기소하지 않으면 사건은 언제든지 은폐될 수 있는 구조다. 검찰이 가진 막강한 권력은 정치권의 권력형 비리사건 뿐 아니라 이렇게 일상적으로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시사회가 시작하기 전 표를 받고나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아 혼자 밥을 먹었다. 혼자 먹기에 마땅한 메뉴가 없어 대충 국밥 한 그릇으로 때우려고 했는데 달궈진 뚝배기에 담긴 국밥을 삼키듯 먹다가 입천장이 홀랑 다 벗겨졌다. 혀끝으로 벗겨진 입천장을 다독이며 영화를 보아야 했다. 배는 불렀지만 어딘가 불편했다. 통쾌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언가 허전한 건 영화 <재심>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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