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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Apr 15. 2017

영화 '아프리칸 닥터(2016, 줄리앙 람발디)' 후기

무서워하지 마, 안심해도 돼, 어차피 함께 살게 될거야.

술에 잔뜩 취한 세욜로가 산책을 한다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웃음을 짓고 있지만 사실 잔뜩 화가 나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아내는 더 이상은 못 살겠다며 짐을 싸서 그의 곁을 떠났고 경찰은 출신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했습니다. 그에게 남은 건 이제 두 아이 뿐입니다. 지칠 만큼 지친 세욜로가 자살이라도 할 기세로 비틀비틀 비오는 시골길을 걸어갑니다. 세욜로를 잘 아는 마을 어르신이 그를 말려보지만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큰 사고라도 칠 듯 씩씩거리며 굳이 남의 집 목장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쓰러진 이 사내 앞에 하필 거대한 소 한 마리가 나타납니다. 흰 콧김을 뿜어내며 괴상한 소리를 내는 이 거대한 짐승 앞에서 세욜로는 그만 기겁하고 달아납니다. 소는 그저 콧김을 한 번 내뿜었을 뿐인데 말이죠.


아참, 세욜로가 누구냐구요? 콩고 출신의 검은 피부를 가진 이 사내는 프랑스 북부의 시골마을 ‘말리 고몽’에서 이제 겨우 몇 명의 환자를 받은 신출내기 의사입니다. 프랑스 대학에서 의사 자격증을 따고 고국 콩고의 대통령 주치의 대신 프랑스 정착을 택한 세욜로에게 말리고몽에서의 삶은 무척 혼란스러운 정착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녀들에게 혼란한 고국보다 안정된 프랑스의 삶을 물려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말만 프랑스지 세욜로의 고향만도 못한 시골에서 세욜로와 그 가족들은 서서히 지쳐갑니다.


마을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또 완고합니다. 흑인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도 많습니다. 진료를 받으러 와서 의사의 얼굴을 보고 바로 도망치거나 왕진을 간 세욜로에게 멀리서 총을 쏴 내 쫒는 식입니다. 세욜로의 아내는 시장에서 바보취급을 받습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맙소사’라고 외치며 달아납니다. 세욜로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지요. 모든 것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로부터 의사로 인정을 받고 싶었던 세욜로는 기죽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갑니다. 술집에서 함께 다트 놀이를 하고 술을 나눠 마시는 건 기본이고 자신을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는 여인의 출산을 돕기도 합니다. 마을의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낸 세욜로에게 행복이 갑자기 찾아오진 않습니다. 자신을 마을 보건의로 초대했던 시장의 정적이 세욜로를 형사고발하여 체포당하게 한 것이지요. 세욜로는 의사면허도 정지당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듯 억울하고 힘든 시간, 그 좌절의 끝에서 세욜로는 소를 보고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던 것입니다.


세욜로가 어둠속에서 소를 마주치는 이 장면은 영화 <아프리칸 닥터>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입니다. 영화의 분위기는 이 장면을 전후로 완전히 달라집니다. 스토리의 변곡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앞 부분이 세욜로 가족이 낯선 마을에서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그렸다면 뒷 부분은 마을사람과 완전하게 동화된 적응 이후의 모습을 그립니다.


소를 보고 놀라 도망가던 세욜로는 바로 그 때 ‘낯선 존재’라는 의미에 대해 자각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아무런 공격의 의사도 없던 소에게 극도의 공포를 느꼈던 자신 같이 말리 고몽의 백인들도 그런 것 아니었을까. 그들은 단지 익숙하지 않았던 것 아니었을까.” 이렇게 말이죠.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인식을 통틀어 검증되지 않은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가집니다. 신이나 유령과 같이 실체가 없는 존재라면 공포나 맹신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이방인과 같이 실체가 있는 존재라면 배척이나 혐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소’라는 실체는 세욜로의 경험 속에서 (안심해도 되는) 검증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거죠. 어쩌면 이 장면은 영화 내내 ‘말리 고몽’이라는 견고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차별을 받아왔던 피해자 세욜로가 한 순간에 가해자의 체험을 하게 되는 장면인 셈입니다. 제 생각이 맞다면 가해자가 피해자 체험을 함으로써 인식이 바뀌는 여느 스토리들과는 무척 다른 구성이네요. 그 때문인지 영화는 인종차별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끝까지 경쾌한 리듬을 유지합니다.


물론 그 흰 '소'를 세욜로가 다가서기 어려웠던 백인사회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마을 어르신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의 목장 울타리를 넘어 들어갔고 거기서 소를 보고 질겁해서 도망가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을수도 있겠네요. 세욜로가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했던 그 순간이었으니까요. 해석이 어떠하든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영화 <아프리칸 닥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콩고 출신 의사 세욜로가 겪는 정착 과정이 인고의 시간을 겪어내는 인간승리의 감동 스토리가 아니라 아기자기한 코메디로 그려집니다. 함께 웃고 울다보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다가오지요. 프랑스에서는 60만 정도의 관객이 들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상영관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는지 너무 빨리 내려졌네요. 이 영화를 배급한 이마붑(Mahbub Alam)과 현장 교육을 다니는 중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어요.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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