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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Mar 28. 2017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후기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읽는 네가지 키워드 


겨울 해변가에 한 여인이 길게 누워있다.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외로움을 견디던 지난 밤, 여인은 상기된 얼굴로 분노를 쏟아내야 했다. 호기심 반짝이는 눈으로 걱정되는 척 떠보거나 뒷말을 하던 사람들을 향한 날선 항변이었다. 혀가 안으로 말린 듯 짧은 소리를 내다가도 어느새 정색을 하던 여인. 그녀는 누구와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고립되어 있다. 숨겨두었던 발톱을 내밀고 갸르릉 거리는 암고양이처럼 아주 가끔 자신의 욕망을 꺼내 보일 뿐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끝내 꿈으로 환치된다. 술에 취했던 걸까. 꿈속에서조차 그녀는 화해하지 못한다. 젖은 모래를 탈탈 털어내고 제 갈 길을 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끝내 외롭다.



술  


나누고 비운다. 빈 곳에 다시 채우고, 채우다 끝내 운다. 경계가 느슨해지고 오해가 풀리지만 혀는 꼬이고 이야기도 꼬인다. 고백하고 끌어당기고 받아들인다. 배시시 웃다가도 정색을 하고 날을 세운다. 한바탕 화풀이가 끝나면 다시 잔을 채우고 또 비운다. 술자리에서 남자들은 하나같이 늙어 보이고, 무기력해보이고 또 찌질하지만 언니들은 영민하다. 서툰 말보다 차라리 체온을 나누는 것이 위로라는 걸 그녀들은 알고 있다. 개뿔도 모르면서 맞장구치고 위로해주기 바쁜 건 남자들이다. 다들 추한 짓을 하면서도 겉으로 티를 내지 않는 자들이다. 모두 입을 모아 그녀의 기분을 맞추고 있지만 정말 그녀의 속을 들여다 봐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누구도 자신의 속을 내보이지 않는다. 고장난 녹음기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된 여인만이 서툴게 욕망의 고해성사를 한다. 늙은 감독은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술을 마시고 시를 읽어준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위한 프로포즈에 푹 빠져있다.





은밀한 시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실의 시간이다. 몇 시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물어볼 사람도, 아는 사람도 없다. 멀리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만 봐도 두렵다. 피할 수 있다면 가급적 피하고 싶다. 그러나 밤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해변가에서도 밤은 깊은 어둠 속으로 그녀를 데려간다. 그녀는 몇 년 동안 밤의 한 복판에 내 몰려 있었다. 모든 것이 정지되었고 은폐되었지만 한 순간도 편히 잠들수 없었다. 바다 건너 먼 도시에 숨어들때부터 그랬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콘도의 창문을 힘겹게 닦아내던 검은 옷의 남자는 밝은 세상으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욕망을 대리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해변


거기가 어디든, 해변은 다른 세계와 맞닿아 있는 현실 세계의 끝자락이다. 그 곳은 도덕과 일탈, 억압과 욕망의 경계다. 해변은 육지에 두 발을 딛고 망망대해를 향해 까치발을 든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욕망의 거침없는 질주를 가로막는 것도 해변이다. 경계의 길목에 놓인 마지막 바리케이트인 셈이다. 그 곳에서는 서로 등을 맞댄 수만 개의 모래알들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녀가 함부르크의 어느 해변가에서 맥없이 쓰러졌던 것처럼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 역시 해변가 도시(강릉)에 주저앉아 있지 않은가. 그래도 자유를 향한 욕망에 이끌려 그 억압의 모래밭을 용케 통과한다면? 그 때는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건 규범체계로 상징되는 이 세계를 등진 대가다. 유감이겠지만, 그게 이 바닥의 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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