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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May 29. 2018

영화 '버닝'의 삼각관계 관전기

#그_남자


남자는 소설을 쓴다. 쓴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소설을 쓰는지 답하지 못한다. 그는 틈틈이 타이핑을 하지만 소설을 쓰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가끔 남산타워에 반사된 햇빛을 응시하며 자위행위를 하고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잠을 청한다. 남자는 어딘가 찌질해보이거나 가끔은 무력해 보인다. 남자는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사랑이라고 말하는게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남자의 사랑은 불현듯 시작되었다.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유년시절, 우물에 빠진 여자를 구했다는 자부심만이 남자를 충만하게 한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우물이라 그게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게 꼭 중요한건 아니다.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된다고 여자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체도 없는 귤을 음미하듯, 사라진 여자를 찾아다닌다. 남자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여자 뿐이다.   


#여자

여자는 춤을 춘다. 나레이터 모델이라곤 하지만 딱히 직업적으로 춤을 추는 여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설렁설렁 춤을 추고 돈을 번다. 카드빚 때문에 집에도 가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는다. 여자는 담배를 즐기고 아무데서나 꾸벅꾸벅 졸고, 말하다 눈물을 흘리고 가끔 훌렁훌렁 옷을 벗어던진다. 최근엔 춤을 춰서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에도 다녀왔다. 여자는 즉흥적이다. 한 번의 섹스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안다. 여자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아프리카에서 배워 온 춤을 춘다. 흐느적거리며 해실해실 잘도 춘다. 자신을 지켜보는 남자의 마음 따윈 안중에 없다. 그냥 바람에 몸을 맡기고 타인의 시선에 몸을 맡긴다. 바람처럼 또는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어했던 여자는 어느 순간 세상에서 증발하고 만다. 


#또_다른_남자 

여자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또 하나의 남자는 그냥 노는 남자다. 딱히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수 없을 만큼 한가해 보이는데 써도 써도 끝이 없을 것 같이 부유하다. 스포츠카를 타고 강남의 고급 빌라에 살면서 그저 친구들을 불러모아 노닥거리는 걸 낙으로 삼는다. 신이 있다면 이 남자 같을까. 그는 존재 자체가 남자와는 다르다. 여자친구를 수시로 바꾸고 서울 외곽을 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뭐든 자기가 마음 먹은대로 할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표정은 평온하고 여유가 넘친다. 결핍을 모르기에 눈물은 흘려본적도 없다. 제물을 받는 신처럼 원하는 요리를 만들어 즐기고 원하는 시기에 규칙적으로 비닐하우스에 불을 놓는다. 원하는걸 취하고 원하지 않는걸 소멸시키는 권능을 가진 그를 신이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시_그_남자 

남자와 또 다른 남자는 일정한 궤도를 도는 행성처럼 여자를 중심으로 거리를 유지한다. 남자는 신과 같은 또 다른 남자에게 열등감을 느끼지만, 또 다른 남자 역시 그 남자에게 질투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들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건 여자가 실종된 이후다. 여자는 노을처럼 사라져버렸다. 마치 홀라당 타버린 비닐하우스같이 여자의 흔적은 세상에서 녹아버렸다. 남자는 또 다른 남자를 의심한다. 취미삼아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던 그에게 남자는 묵혔던 열등감과 분노를 표출한다.  남자는 또 다른 남자와 남자의 차와 자신의 옷을 한꺼번에 태우리라 마음먹는다. 그는 그렇게 신과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물질의 세상과 자신의 허름한 과거를 태워 없앤다. 남자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알몸이 된다. 그는 새 생명으로 태어나고 싶었던걸까. 여자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여자의 빈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길을 상상한다. 아니면 그는 그저 삶의 의미에 굶주렸던걸까. 모두가 사라지고 난 후 홀로된 남자는 타이핑을 한다. 남자가 딱히 소설을 쓰는지 알 수 없다. 타닥타닥 비닐하우스가 타들어가듯 불규칙한 키보드 소리만이 관객의 귓가에 남는다.  


<영화 '버닝'(이창동)의 삼각관계 관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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